[재발견 요산 문학 장소] 가난한 삶 꿋꿋이 견뎌낼 독메 사상의 거처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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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발견 요산 문학 장소 ③덕도산

독메, 외따로 떨어진 작은 야산
낙동강 들판에 섬처럼 솟아있어
독립 만세 때 숨진 선조들 묻혀
미천한 백성들 위대한 삶 상징

낙동강 들판의 덕도산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해발 38.3m 야산, 독메다. 미천한 삶을 견디리라는 것이 요산의 독메 사상이다. 최학림 기자 theos@ 낙동강 들판의 덕도산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해발 38.3m 야산, 독메다. 미천한 삶을 견디리라는 것이 요산의 독메 사상이다. 최학림 기자 theos@
낙동강 들판의 덕도산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야산으로, 요산 작품에 나오는 독메다. 미천한 삶을 견디리라는 것이 요산의 독메 사상이다. 최학림 기자 theos@ 낙동강 들판의 덕도산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야산으로, 요산 작품에 나오는 독메다. 미천한 삶을 견디리라는 것이 요산의 독메 사상이다. 최학림 기자 theos@

‘독메’는 요산 김정한의 1970년 작품이다. 구포 건너편인 부산 강서구 낙동강 삼각주 들판(강동동, 대저2동)과 그곳의 조그마한 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독메’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산을 말한다. ‘엄청나게 큰 능도 같고, 조물주가 떨어뜨리고 지나간 흙덩이와도 같은 독메들이 바다같이 허허한 들 가운데 역시 아쉽잖게 울쑥불쑥 솟아 있기 때문에, 그곳 토박이들은 그것을 숫제 섬바위니 들섬이니 하고 부른다.’

독메가 주목되는 이유는 요산 문학 속에 ‘독메 사상’이라 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지조를 지키는 삶이 독메의 삶이요, 그런 삶을 살아가는 단단한 정신이 독메 사상이다. 소설에서는 3·1운동 때 ‘어떻게 시인도, 또 똑똑한 지식인들도 아닌 이곳 무지렁이들이 그렇게 용감하게 싸웠을까’ 하는 대목이 있다. 알아주지 않고 이래저래 잊힌 그런 무지렁이들의 삶이 들판에 나지막하게 홀로 자리 잡은 독메 같다는 것이다.

구포 건너편 들판에 있는 그 독메는 강동동 덕도산(德島山)이다.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덕도산은 해발 38.3m로, 이를테면 부산에서 가장 낮은 산이며, 낙동강 삼각주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보다는 동산에 가까운 이곳 면적은 0.6㎢이다(<부산지명총람 제5권>). 소설 속에서 독메는 독립 만세 통에 일본 헌병들의 야만적인 총탄 앞에 스러진 ‘점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점이 남편 ‘윤서방’의 선조들이 묻혀 있는 야산이다.


덕도산의 평평한 정상 일대는 주변을 시원하게 전망는 가운데 산소 수백 기가 군집한 공동 묘지에 가깝다. 최학림 기자 theos@ 덕도산의 평평한 정상 일대는 주변을 시원하게 전망는 가운데 산소 수백 기가 군집한 공동 묘지에 가깝다. 최학림 기자 theos@
덕도산에서는 멀리 대동 수문을 비롯한 낙동강 평야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최학림 기자 theos@ 덕도산에서는 멀리 대동 수문을 비롯한 낙동강 평야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최학림 기자 theos@

그런데 구포 건너편 낙동강 들판에는 나지막한 산이 두 곳 있다. 덕도산과 함께 칠점산(대저2동)이 있다. 칠점산이 독메일 수 없을까. 칠점산은 원래 7개 봉우리로 이뤄진 산이었으나 안타깝게 현재는 1개, 그것도 일부가 깎여나간 모습으로 남아 있다. 배종진 강서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은 “비행장 활주로를 만들기 위해 일제강점기 때 봉우리 3개를 허물고 한국전쟁 때 4개를 마저 허물던 중 각종 사고가 일어나면서 현재처럼 겨우 하나가 살아남은 셈”이라고 했다. ‘독메’가 발표될 1970년 당시 이미 칠점산은 소설 속 모습과 달리 선산이 될 수 없는 처지였다.

이에 반해 덕도산은 둘레에 3개 자연마을(북정·덕계·상덕마을)을 품을 정도로 매우 넓다. 산소를 마련할 곳이 마땅찮은 들판에서 덕도산의 평평한 정상 일대는 수백 기에 이르는 산소가 군집한 공동묘지 수준에 가까웠다. 소설가 나여경 요산문화연구소 연구원은 “작은 바위산으로 남은 칠점산은 선산이 자리 잡은 독메가 될 수 없다”며 “이곳 덕도산이 독메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했다. 그는 “더욱이 ‘칠점산’처럼 널리 알려진 영산(靈山)을 요산이 ‘독메’라는 범칭으로 썼을 리 없다”고 지적했다.

칠점산 7개 봉우리 중 마지막으로 반쯤 깎여나가다 살아남은 최후의 1개 봉우리 모습. 부산역사문화대전 캡처 칠점산 7개 봉우리 중 마지막으로 반쯤 깎여나가다 살아남은 최후의 1개 봉우리 모습. 부산역사문화대전 캡처
칠점산의 반쯤 깎여나간 마지막 봉우리를 다른 쪽에서 바라본 모습. 부산역사문화대전 캡처 칠점산의 반쯤 깎여나간 마지막 봉우리를 다른 쪽에서 바라본 모습. 부산역사문화대전 캡처
부산 강서구 대저1동 칠점마을 금강슈퍼 앞 군부대 담장 아래 서 있는 칠점산 표지석. 최학림 기자 theos@ 부산 강서구 대저1동 칠점마을 금강슈퍼 앞 군부대 담장 아래 서 있는 칠점산 표지석. 최학림 기자 theos@

여하튼 소설에서는 뒷줄 좋은 돈 많은 사업가가 독메의 대부분인 국유임야를 불하받고, 3·1운동 영령이 잠든 그 선산까지 사들이려고 한다. 강 노인은 독립 만세 통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한꺼번에 잃고 고아 신세가 된 ‘점이’를 거둬 키운 수양아버지다. 강 노인의 말은 요산의 독메 사상을 투박하고도 감동적으로 집약하고 있다.

“그 산소를 팔다이? 거, 거게 어떤 분이 누붓다꼬! 도, 돈에 팔리는 그런 빼(뼈)가 아니라 말이다. (중략) 만세 때는 머한다꼬 두 부자가 다 죽웃건데? 씨가 다르다 말이다, 씨가…. 니가 그 거, 걸레 겉은 옷을 입고 리아카를 끌고 댕기는 것도 씨가 달라 그렇다. 아, 아무나 몬 한다 말이다. 비, 비록 그라고 살더라도 별별 짓 다해 가며 치매(치마)나 질질 끗고 댕기는 그, 그런 것들 하고는 질이 다르다 말이다. (중략) 온갖 나뿐 짓 해 가주고 지금 돈냥 있다고 이런 소리 저런 소리 하고 대, 댕기는 그런 빽다구(뼈다귀)가 아이라 말이다. 알겠나?”

옳음을 추구한 대가라 하더라도 능히 미천하게 살 수 있는 품성의 ‘씨와 뼈다귀’, 그것이 독메 사상의 핵심이다. 넓은 들판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야산이 그런 삶과 사상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친일 전력’이 ‘독립운동 희생’보다 득세하는 역사적 허무도 “그래 봐라”며 감내하는 묵묵한 역설이 미천한 무지렁이 삶의 위대함을 말하는 독메 사상인 것이다.

독메는 ‘인간단지’ ‘산서동 뒷이야기’ ‘사밧재’ 등 요산 대표작에 장소를 달리하면서 계속 변주된다. 요산은 독메란 말과 그 뜻에 주목했다고 볼 수 있다. 낙동강 들판의 덕도산과 칠점산은 애초 섬이었다. 그 섬들은 밀려 내려온 토사를 붙잡아 거대한 낙동강 평야를 만든 일종의 조물주였다. 독메는 평야를 빚어낸 조물주이며, 이윽고 그 독메에 사람살이까지 깃들었던 것이다. 독메가 토사를 붙잡아 너른 평야를 빚은 것처럼 요산의 독메 사상은 사람들 마음을 붙잡고 움직여 많은 이들에게 더욱 깊게 깃들어갈 것이다. -끝-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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