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존엄하게 죽을 권리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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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로 설 수 있을 때 떠나고 싶어. 무릎 꿇고 살고 싶지 않아.”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과 일상을 잃어 가던 브라이언은 자발적 죽음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디그니타스가 있는 스위스를 찾아 생을 마감한다. 작가 에이미 블룸은 남편의 뜻을 존중해 그 여정을 동행하며 〈사랑을 담아(In Love)〉라는 책으로 남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이 이야기를 2022년 최고의 논픽션으로 선정하며 “때론 슬픔은 가장 지극한 사랑으로 몰아낼 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줬다”는 서평을 실었다.

드리스 판 아흐트 네덜란드 전 총리가 지난 5일 안락사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죽음 선택권’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평생을 가톨릭 교인으로 산 그가 93세 동갑 부인과 동반 안락사를 선택한 것이다.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투병 생활을 해 왔고 부인 역시 건강이 아주 안 좋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죽음은 집에서 의사와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졌다. 우리에겐 낯설다 못해 당황스럽기까지 한 풍경이지만 유럽에서는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가 느는 추세다.

의료진이 환자에게 투약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을 ‘안락사’, 의료진의 약물 처방을 받아 스스로 실행할 경우 ‘의사 조력 자살’,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인공호흡 중단 등의 경우를 ‘연명의료 중단’ 등으로 구분한다. 국내에서는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 시행으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지만 이를 넘어선 약물 투여나 처방은 불법이다. 하지만 스위스 디그니타스에 가입한 한국인이 117명에 이르고 이미 4명이 조력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는 해외 직구를 통한 ‘안락사약’ 국내 불법 유통과 10명의 사망 사례가 보고됐다.

아무리 ‘행복한 죽음’이라 해도 안락사는 여전히 종교, 윤리, 의학 차원에서 논쟁적 주제일 수밖에 없다. 현대판 고려장 악용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초고령사회를 맞아 안락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점점 많아질 수밖에 없다. 아프지 않고 잠결에 세상을 떠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기대 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건강 수명이 따라가지 못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마침 헌법재판소가 최근 60대 하반신 마비 환자의 헌법소원 청구를 받아들여 정식 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인간답게 죽을 권리’에 대한 진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때가 됐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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