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것 그대로 중국조선족 구연설화 83편 채록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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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홍 부산대 명예교수 책 묶어
정리설화와 차원 다른 귀한 작업

이헌홍 부산대 국문과 명예교수. 이헌홍 제공 이헌홍 부산대 국문과 명예교수. 이헌홍 제공

모든 것은 사라진다. 문화도 그렇다. 그래서 기록이 필요하다. 이헌홍(76) 부산대 국문과 명예교수가 최근 출간한 <중국조선족 이야기꾼의 구연설화>(박이정)는 기록이다. 부산과 옌볜의 먼 거리를 극복하고 탄생한 귀한 기록이다. 이번 책에 실린 중국조선족 구연자 12명의 설화 83편이 그것이다. 전체 580쪽 중 구연설화는 430쪽 분량으로 실렸는데, 조선족 방언과 말투 풀이에 공을 들였다.

귀한 기록이라는 것은 남한 학자가 유례없이 ‘직접 채록한 구연설화’이기 때문이다. 특히 3000편을 헤아리는 중국조선족 설화는 모두 중국 당국의 검열을 염두에 두고 가공됐거나, 중국에서 ‘민족문학작가’라 일컫는 채록자가 그 내용에 개입해 윤색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정리설화’라는 그럴듯한 명칭으로 부른다. 생생한 날것 그대로의 ‘구연설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헌홍 교수팀이 중국 현지에서 구연설화를 채록하는 모습. 부산일보 DB 이헌홍 교수팀이 중국 현지에서 구연설화를 채록하는 모습. 부산일보 DB

“지난 2012년 함북 출신의 조선족 김태락의 구연설화 50편을 채록해서 국내 처음 소개했어요. 그런데 학계에서 후속 작업이 이어지지 않는 거예요. 안타까운 마음에서 이번에 추가 작업을 했습니다.” 이번 구연설화도 이전 것처럼 1999~2000년 옌볜에서 이 명예교수팀이 직접 채록했다. 아무나 직접 현지를 방문한다고 채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침 이 명예교수의 제자 중에 조선족 학자가 있어 현장 채록이 가능했다고 한다.

“채록 당시 구연자 12명 중 9명이 65~76세로 그 이후 20여 년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은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요. 채록된 구연설화는 화석 같은 기록입니다.” 채록된 구연설화는 범상하게 얘기하자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멀리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구수한 옛날 이야기다.

이 교수가 보기에 조선족은 특이하다.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은 토착민이지만, 조선족은 19세기 중·후반~1945년 국경을 건넌 이주 정착민이다. 따라서 조선족의 문화적 기반은 ‘근대 여명기의 조선 문화’이기 때문에, ‘쫓겨난 세조 딸 이야기’를 비롯해 조선시대 얘기가 많다. 또 ‘정리설화’와는 달리 중국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는 ‘중국 사신을 혼내 준 이야기’ 같은 것도 있다.

<중국조선족 이야기꾼의 구연설화>. 박이정 제공 <중국조선족 이야기꾼의 구연설화>. 박이정 제공

조선족 설화라고 하면 당연히, 힘들었던 이주 정착 과정의 비화를 담은 설화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 채록된 ‘함경도 지방 이야기’와 ‘어느 장사꾼의 죽음’은 살인, 강도, 복수극 따위가 나오는 다소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설화다. 이 교수는 “앞으로 중국 조선족 구연설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나 연구자는 제가 작업한 두 권에 담긴 총 133편을 주요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한국 고전소설을 전공했는데, 거기서 나아가 <동북아시아 한민족 서사문학 연구> <재일한인의 생활사이야기와 문학> 등 저서를 통해 그 관심을 동북아로 확대해 왔다. 이번 작업도 그 확대의 결과물이다.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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