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에 발목 잡힌 세상을 향한 독립선언문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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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더, 많은 숫자의 지배 / 미카엘 달렌·헬게 토르비에른센

페이스북·인스타그램의 '좋아요'
개인 일상마저 숫자로 가치매김
'숫자의 허상' 꼬집는 시각 독특

<매일, 더, 많은 숫자의 지배> 표지. <매일, 더, 많은 숫자의 지배> 표지.

<매일, 더, 많은 숫자의 지배>는 영화 ‘매트릭스’의 빨간약 같은 책이다.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모피어스로부터 받은 빨간약을 먹고 자신이 매트릭스에 갇혀 기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매일, 더, 많은 숫자의 지배>를 읽고 내가 ‘숫자’의 지배 속에 갇혀 살고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SNS가 발달하면서 사소한 일상과 가치마저 숫자로 정량화한다. 페이스북의 팔로어가 몇 명인지, 인스타그램 사진에 ‘좋아요’는 몇 개나 달렸는지, 우리는 매일매일 헤아리며 산다. 페이스북에선 하루에 50억 개 이상의 ‘좋아요’가 생성된다. 분당 400만 개 수준이다. 인스타그램 이용자들은 1분마다 약 200만 개의 친구·지인 이미지에 ‘좋아요’를 누른다. 이를 통해 우리는, 누군가의 여름 휴가가, 저녁 식사 메뉴가, 취미 생활이, 해변에서 드러낸 몸매가, 얼마나 인기 많은지 혹은 적은지 바로 알 수 있다. 나의 여름 휴가가, 저녁 식사 메뉴가, 나의 모든 일상이 남들의 평가 대상이 된다.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그런데 왜 매일의 일상을 남들에게 점수 매기게 하는가. 과시욕과 인정욕이 묘하게 교차해 만든 아이러니다. 그리고 그 결과, 숫자에 권력을 부여한다. SNS의 팔로어 수는 곧 돈과 같은 가치를 얻는다. 오랜 많은 연구에서 돈과 연관될수록(심지어 돈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좀더 계산적으로 변하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감이 커진다는 점이 밝혀졌다. SNS의 숫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것에 집착할수록 우리는 계산적이며 이기적으로 변한다. 물론 SNS의 숫자가 만족스러울 경우에 한해 자신감이 충만해지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숫자가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의 본질이라 여겨지는 객관성 때문이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이때문에 숫자는 우리가 의심이나 비판, 고민 따위를 하지 않게 만든다. 실제로 같은 내용의 뉴스라도 수치가 포함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듣는 동안 인간 뇌의 반응이 다르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피실험자의 뇌를 스캔한 결과, 수치가 포함된 뉴스를 들은 피실험자들은 전전두엽 피질이 더 활성화됐다. 전전두엽 피질은 관점을 바꾸는 능력과 공감 능력을 통제하는 부분이다.

혹자는 말한다. 나는 절대 뉴스나 신문 기사에 나오는 수치 따위는 믿지 않는다, 뻔한 의도에 속지 않는다, 라고. 애석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숫자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90%’라는 기사(a)와 ‘5%’라는 기사(b)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a기사를 읽은 사람 A도, b기사를 읽은 B도 모두 각자가 읽은 기사 내용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전쟁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A가 B보다 대체로 전쟁 가능성을 높게 봤다. 노출된 숫자를 믿지는 않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 숫자가 하나의 기준점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90%보다는 낮을 것’이라는 판단과 ‘5%보다는 높을 것’이라는 판단은 결코 같지 않다. 전자는 50~80% 정도에 생각이 머물고, 후자는 10~40% 정도에 생각이 머물 가능성이 크다. 학자들은 이를 ‘앵커링’ 현상이라 부른다.

저자는 이처럼 숫자와 관련된 다양한 현상과 실험 결과를 제시하며 최종적으로 ‘수는 객관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이제 곧 선거다. 또 한 번 지지율이라는 숫자의 향연이 펼쳐질 테다. 최근 들어 여론조사의 허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크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비교하는 것 말고는 선거 국면을 파악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 숫자를 이용하되 속거나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 <매일, 더, 많은 숫자의 지배>라는 빨간약이 마침 꼭 필요해 보인다. 미카엘 달렌·헬게 토르비에른센 지음/이영래 옮김/김영사/232쪽/1만 5800원.


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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