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내 ‘관계적 폭력’, 맞지 않아도 무서웠다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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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돌림 등 피해 상담 60% 육박
증거 없어 학폭위 처벌도 어려워
흔한 갈등 치부 땐 고통 증폭돼

‘관계적 폭력’을 방치했다간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남을 수 있다. 부산일보DB ‘관계적 폭력’을 방치했다간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로 남을 수 있다. 부산일보DB

학교폭력 가운데 대인 관계를 이용한 ‘관계적 폭력’ 문제는 여전히 그늘에 있다. 관계적 폭력은 특정 학생 주변 인간관계를 차단하는 등 대인관계를 이용한 폭력이다.

흔히 친구 갈등으로 생각하고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또래와 어울리는 시간이 많고 정서적으로 예민한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산일보〉가 취재한 청소년 심리 전문가들은 관계적 폭력을 학교폭력 핵심 유형으로 지목했다. 관계적 폭력은 무리를 지어 어울리던 학생들이 갑자기 한 친구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주도하는 학생은 서열과 가스라이팅을 통해 관계를 조종한다. 여학생 사이에는 주로 관계적 폭력, 남학생 사이에선 신체적 폭력이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이하 청소년상담원)이 발행한 ‘학교폭력 외상 피해 청소년 상담개입 매뉴얼 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학교폭력 피해 상담 학생 중 주요 피해 유형은 따돌림이 58.1%로 가장 많았다. 언어폭력 54.7%, 사이버 폭력 30.2%, 신체폭력 23.3% 순으로 뒤를 이었다. 학교 폭력 대부분이 관계적 폭력 중 하나인 따돌림과 중복해서 나타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정서 발달 시기에 경험한 관계적 폭력은 피해 학생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하지만 관계적 폭력은 현행 제도에서는 학교폭력으로 처벌받는 경우가 적다. 뚜렷한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다. 학교폭력 신고가 접수되면, 우선 교내 전담기구에서 최초 조사를 벌이고 여의치 않으면 교육지원청 산하 심의위원회에서 조사를 진행한다.

하지만 조사가 ‘증거’를 토대로 진행하다 보니, 교묘한 관계적 폭력은 사각지대에 놓인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학생들 사이 폭력 양상은 오래전부터 드러나지 않게끔 괴롭히는 방식으로 바뀌어 갔다”며 “피해 학생의 경우 맞으면 증거라도 있으니 차라리 맞는 게 낫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직접적인 폭력 행위가 없다 보니 가해 학생도 ‘그냥 말을 섞지 않았을 뿐 이게 무슨 폭력이야’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주변 친구들이 방어자가 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청소년상담원 차주환 부장은 “주변 친구들이 방관하면 문제가 끊이지 않고 다른 타깃을 찾아가는 경우가 많다”며 “방관자였던 학생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피해 학생에게 다가가는 ‘방어자’가 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계적 폭력에서는 누구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부산생명의전화 문갑수 실장은 “관계적 폭력이 발생했을 경우 아이들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모두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정서적 상담이 이뤄져야 한다”며 “학교에선 아이들에게도 친구 관계의 암묵적인 우열을 따지는 무의식이 자리잡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장기적으로 교육환경을 바꿔나가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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