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홍 친일 작품 60여 점 헤아린다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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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5년 친일 잡지에 게재
근년 각종 자료 공개 속속 밝혀져
소설 시 수필 만화 표지화 ‘다양’
전쟁 동원 옹호, 황국신민 강조
과장 말고 중층적 접근 필요해

향파 이주홍. 부산일보 DB 향파 이주홍. 부산일보 DB

있는 것을 없다고 할 수 없으며 가릴 수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무엇 하나를 너무 과장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진실이 무엇인지, 어떠한지를 밝히면서, 총체적이고 중층적인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향파 이주홍(1906~1987)은 요산 김정한(1908~1996)과 더불어 부산문학의 터를 다진 작가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2010년대 이후 향파 이주홍의 친일 행적을 드러내는 글들이 점차 발표돼왔다. 일제 말기 자료들이 영인돼 누구나 볼 수 있는 시대가 돼 많은 이들이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2011년 “이주홍 연표에서 빠진 1941~1942년 만화가 감춰진 친일의 흔적으로 충격적”이라는 글(오진원 ‘이주홍 연표의 비어있는 기간을 찾아서’)이 처음 발표됐다(그 전에 1966년 임종국이 <친일문학론>에 5편, 2004년 박태일이 <경남·부산 지역문학 연구Ⅰ>에 8편을 간략히 언급한 일이 있다). 이를 가만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주홍을 30여 년 연구한 지역연구자인 류종렬 부산외대 명예교수는 밝혀지지 않은 자료들을 수습하면서 연구에 나섰다.

그는 이주홍문학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는데 “인간적으로 주저한 면이 있었으나 이주홍 문학 활동이 한국근대문학사와 부산문학사에서 올바로 평가되기 위해서 묻힌 자료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2013~2018년 관련 논문 8편을 발표했다. 이중 논문 3편과, 원문 자료 7편을 싣고서 거의 배포하지 않은 <이주홍과 동양지광>(2017, 세종출판사)이란 책도 출간했다.

향파 이주홍. 부산일보 DB 향파 이주홍. 부산일보 DB

류 명예교수의 논문을 취합하면 1939~1945년 이주홍이 발표한 친일 작품은 64편을 헤아린다. 이중 단편소설(1) 시(2) 수필·논설류(5)가 8편이며, 대부분은 만화(36)와 표지화(20)로 56편에 이른다. 이들 작품은 ‘일본정신의 수양도장’을 자처한 가장 대표적인 친일 사상지 <동양지광(東洋之光)>에서 37편,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부추긴 조선금융조합연합회의 기관지 <가정의 친구(家庭の友)> <반도의 빛(半島の光)>에서 27편이 각각 확인된다.

첫째 단편소설 1편, 시 2편, 수필·논설류 5편을 보면 1편의 기행보고문(<반도의 빛>)을 빼고는 모두 <동양지광>에 일본어로 쓴 것이다. 수필·논설류의 친일 혐의는 뚜렷하다. 6쪽으로 이뤄진 ‘학제 개혁과 학도의 각오’는 창씨개명한 이름(川原周洪)으로 썼다. ‘오늘날의 전쟁은 문자 그대로의 총력전이다... 학교도 전장이다... 학도 각각도 전사이다. 배우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다.’라며 ‘학원은 생명 있는 ‘사고하는 탄환’을 산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전쟁에 교육을 내던지는 것을 옹호한다. 전쟁은 미국과 싸우는 태평양전쟁이다.

향파 이주홍(왼쪽에서 두 번째)이 요산 김정한(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 부산일보 DB 향파 이주홍(왼쪽에서 두 번째)이 요산 김정한(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 부산일보 DB

9쪽의 ‘반곡선생과 그 제자들’, 4쪽의 ‘청년과 도의’, 3쪽 ‘가두쇄담’도 ‘오늘날 큰 전쟁은.. 성스러운 전쟁이다’라고 운운한다. 특히 ‘가두쇄담’에는 ‘여기는 대해의 한복판’이란 시도 첨부해 ‘콰-앙/콰-앙/적에게 보내는 화약 냄새’라는 구절을 넣었다. 단편소설 ‘지옥 안내’는 미국의 루즈벨트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원흉이라며, 그를 미국민의 자유와 행복이 아니라 선거 승리를 획책하는 ‘위선자 자식’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둘째 만화 36편과 표지화 20편은 이주홍의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동양지광>에 1943~1945년 대일 협력적인 표지화를 20차례나 그린 건 그 재능의 아까운 소모였다. <동양지광>에 게재한 10편의 시사만화와 전쟁만화, <가정의 친구>와 <반도의 빛>에 게재한 연재만화인 15칸짜리 ‘즐거운 박첨지’(10회), 10칸짜리 ‘명랑한 김산 일가’(12회)도 표현 수위가 높은 게 있다. 이를테면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 전쟁에 죽어 바다귀신이 된 미국 루즈벨트와 영국 처칠의 머리를 낚시로 잡았다느니, 일본이 싱가포르를 해방시켰다느니 하면서 총후(후방)에서 황국신민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대일 협력적인 내용을 다각화한다.

향파 이주홍이 시조 시인 이영도, 소설가 최해군과 함께 찍은 사진. 부산일보 DB 향파 이주홍이 시조 시인 이영도, 소설가 최해군과 함께 찍은 사진. 부산일보 DB

박형준 부산외대 교수는 최근 한 글(‘향파 이주홍은 왜 친일을 고백하지 못했나?’, <아크> 7호)에서 “후학 양성과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한 이주홍의 공로는 평가받아야 마땅하다”고 전제한 뒤 “해방 이후 고백과 반성을 대신한 이주홍의 침묵, 그리고 인적 네트워크에 얽혀 과거 사실을 쉬쉬하는 온정주의를 넘어 역사적 진실을 인양하는 사유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문학평론가 구모룡 한국해양대 교수는 “50년 가까운 일제 침탈을 겪은 근대사 속에서 한국 근대문학의 장과 한 문인의 문학·삶을 총체적이고 중층적으로 봐야 한다”며 “일제 말기에 친일 흔적이 있느냐 없느냐 문제도 분명 짚어야 하지만, 친일 가담의 양상이 어떤 것이었나 하는 점을 심층적으로 따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주홍은 문학의 전 분야에 걸쳐 200여 권의 방대한 작품을 냈는데 그 모든 것을 다 지울 수 없는 노릇일진대, 우리 근대문학의 광휘와 뼈아픈 훼절을 중층적으로 통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기본적인 부산 문학사가 정리돼야 한다. 이주홍은 일제강점기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을 했다. 그러다가 일제 말기 전향 훼절한 셈이다. 하지만 해방 직전인 1945년 봄, 일본 경찰에 잡혀 수감돼 있다 해방을 맞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1939~1945년 친일 작품을 쓴 이후 느닷없이 체포됐는데 그 이유가 확실치 않다고 한다. 부산 문학사가 침묵 망각 외면 불분명함 등으로 아직 이렇게 듬성하다는 것이다.

<이주홍과 동양지광>. 세종출판사 제공 <이주홍과 동양지광>. 세종출판사 제공


최학림 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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