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빌런이 판치는 시대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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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 줘’는 주인공을 압도하는 빌런의 활약으로 화제가 됐다. ‘내남결’은 남편과 절친의 불륜을 목격하고 살해당한 강지원이 10년 전으로 돌아가 인생 2회차를 살며 시궁창 같은 운명을 되돌려주는 복수극이다. 배우 이이경과 송하윤이 극 중 강지원의 남편과 절친으로 악역 연기를 펼쳤는데 이들 빌런의 열연과 존재감이 높은 시청률을 견인한 것이다. 예능에서조차 빌런 한 명의 활약이 선남선녀 10명보다 낫다는 말까지 나오면서 ‘방송국 것들’은 ‘이 구역 빌런은 누구’라는 식으로 화제성을 잡기 위한 ‘악마의 편집’도 마다하지 않는다.

빌런은 라틴어 빌라누스(villanus)에서 유래한 말이다. 농장(villa)에서 일하는 일꾼이란 뜻이니 원래 농민이다. 중세 유럽에서 봉건 영주와 귀족의 횡포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도시로 진출해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경우가 흔했는데 이 때문에 악당이라는 의미가 덧씌워진 것이다. 마블 영화에서 히어로를 더욱 빛나게 하는 빌런들의 활약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한 용어가 됐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평범한 사람과 다른 행동을 하는 괴짜나 민폐를 일삼는 사람 등의 확장된 의미로 진화하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빌런들이 활약하게 됐다. ‘독서실 빌런’ ‘지하철 빌런’ ‘스타벅스 빌런’이 그들이다.

최근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는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은 입주민이 주차장 입구를 차량으로 막아 경찰에 고소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름하여 ‘주차장 빌런’이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직장 문화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오피스 빌런’이 공공의 적이다. 세 번은 청해야 일하는 ‘제갈공명 빌런’, 편 가르기 좋아하는 ‘파워레인저 빌런’, 정보기술 변화에 둔감한 ‘흥선대원군 빌런’, 퇴근 시간이면 일을 팽개치고 가버리는 ‘신데렐라 빌런’ 같은 식이다. 당연히 ‘갑질 빌런’과 ‘무개념 빌런’도 빠질 수 없다.

빌런이 정치적 영역으로 옮겨 오면 경계마저 모호해진다. 서로를 악마화하고 빌런이라 공격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국민이 보기엔 모두 빌런인데도 말이다. 사실 빌런의 존재는 부조리한 시대를 반영한다. 세상이 독해질수록 빌런의 활약도 더 독해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빌런일 수 있다. 기후 위기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야말로 지구 행성에서 가장 사악한 빌런이다. 상대방을 빌런이라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대인지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누가 빌런인가.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강윤경 논설위원 kyk9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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