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의 인사이트]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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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하기 어려운 약속 미끼로 희망고문
불신만 쌓이고, 국가 미래조차 사라져

4·10총선 앞두고 온갖 미사여구 쏟아져
부산글로벌법, 산업은행 이전 하세월

여야, 공수만 바뀔 뿐 수도권 정당 본색
희망 실행하는 정직한 정치인 뽑아야

누구에게나 ‘희망’은 있다. 매일 탈모약을 먹고, 탈모샴푸를 쓰고, 탈모크림을 바르면 머리숱이 수북해지고, 어깨너머로 받은 정보로 투자한 주식이 상종가를 거듭 쳐서 10배 이상 수익을 올리고, 원하는 대학에 떨어진 아들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직전에 추가합격하는 것일 수도 있다. 희망은 스스로 기대한 것이라면 틀어지더라도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실현하기 어려운 희망을 미끼로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희망고문’이 된다. 그것이 반복되는 국가나 사회는 미래가 없다. 불신만 쌓이기 때문이다.

희망고문이란 단어는 원래 프랑스 소설가 빌리에 드릴라당이 1883년에 쓴 소설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고리대금을 했다는 혐의로 투옥돼 화형 선고를 받은 유대교 랍비가 감옥 문이 열려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탈옥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만, 감옥 밖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종교재판관이었다. 이뤄지지 않을 ‘거짓 희망’이 한 인간에게는 잔혹한 고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4·10총선이 불과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부산 유권자를 상대로 희망고문이 또다시 시작되는 조짐이다. 부산글로벌허브도시조성 특별법 통과, 한국산업은행 부산 완전 이전이라는 희망이다. 여야 모두 특별법을 5월까지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어디까지 진심일까. 총선 이전의 21대 국회 본회의는 끝났다. 총선 이후에는 책임론에 따른 분란과 집안 단속, 정계 개편, 형사재판 등으로 임시국회는 예상조차 하기 힘들다. 해산을 며칠 앞둔 21대 국회 상임위가 법안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여야의 박수와 축복 아래 통과시킬 가능성은 바라기 어렵다.

2030월드엑스포 부산 유치 실패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제안한 부산글로벌허브도시조성 특별법은 광범위한 특례와 파격적인 규제 해제 내용을 담았다. 부산과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만능열쇠인 셈이다. 하지만, 그만큼 숱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법안 제안에 참여한 의원실조차 “논의 과정에서 더 다듬어질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소관 부처도 교육·국토·기재부 등과 광범위하게 중첩돼 법적 체계와 의제가 한 방향으로 모이지 않은 상태다. 대통령 지시라고 해도 법안이 한칼에 통과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여의도 정치를 너무나 모르는 것이다. 국회 입법 관련 전문가들도 “상임위조차 통과할 수 있을지 모호하다”라고 지적할 정도다. 총선을 앞두고 ‘되면 좋고, 안되면 민주당 탓’이라는 애드벌룬을 띄워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다른 도시와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것도 사실이다. 인천, 대구, 광주 등 타 도시 출신 국회의원과 지자체, 언론에게 “엑스포 유치 실패로 상처받은 부산을 위해 한 번만 눈감아 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애초에 대한민국에 그런 정치력이 존재했는지 금시초문이다. 게다가, 법안을 대표발의한 전봉민 국민의힘 부산시당위원장은 공천조차 받지 못했다. 추동력을 잃은 법은 ‘낙동강 오리알’로 전락할 신세다. 그 와중에 특별법 소관 상임위인 국회 행안위 김교흥 위원장(더불어민주당·인천 서구갑)은 ‘인천 글로벌 경제거점도시 조성 특별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민주당이 부산과 정면충돌하는 모양새다. “21대 국회 내 특별법을 통과시키겠다”는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의 약속은 휴지조각이 된 셈이다.

선거에서 지방 표를 얻기 위한 여의도 정치권의 핑퐁게임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여야 공수만 바뀔 뿐이다. ‘희망고문’ 원조 정당인 민주당 이해찬 전 대표도 문재인 정권 시절 ‘수도권 공공기관 지방 이전’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5년내내 ‘대국민 사기극’으로 끝났다. 당시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서울 경제를 황폐화하겠다는 의도” “가족 분리까지 유발하는 정책”이라며 깎아내리기에 혈안이었다. 초록이 동색인 듯, 여야는 ‘수도권 적폐 정당’ ‘수도권 카르텔 정당’으로 일관한 셈이다. 지방 유권자는 선거 때 자갈치시장만 들여다보면 되는 ‘어리석은 백성’으로 여겨질 뿐이다. 하인이 주인을 속이는 참 이상한 나라다.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사뮈엘 베케트의 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줄거리는 ‘기다림’이다. 며칠이고 고도라는 사람만 기다리는 그 부조리극에서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Nothing to be done)’라는 명대사가 나온다. ‘산업은행 등 2차 공공기관 이전, 국가균형발전, 글로벌허브도시, 지방시대’. 수십 년간 비슷한 희망고문이 반복됐을 뿐,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를 책임지겠다는 정치인이 표를 얻기 위해 함부로 희망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희망이란 미끼를 국민에게 던진다면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까. 4·10총선에서 희망을 실현하는 정치인을 보고 싶은 이유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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