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물감을 소진하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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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하고 희미한 유토피아’전
김용익, 물감 소진 프로젝트
국제갤러리 부산서 21일까지

김용익 작가가 물감 소진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효정 기자 김용익 작가가 물감 소진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효정 기자

‘가진 사람이 더 가지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어느 분야이든 정상의 달콤함을 맛본 사람은 내려오기 싫고 그걸 더 탐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김용익 작가는 미술판에선 작가로도, 교육자로도, 미술 공간 대표로도 정점에 오른 사람이다.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미대에서 학사와 석사를 받고 20여 년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동시에 미술 대안공간 풀 창립 멤버이자 대표를 맡았고, 대형 갤러리를 비롯해 뮤지언급 미술관의 초청을 받아 개인전을 열었다. 국내외 주요 비엔날레, 트리엔날레 초대작가였고 국립 시립 도립미술관들을 비롯해 외국 유명 미술관에도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미술계에서 많은 걸 이루었고 여전히 대형 갤러리의 러브콜을 받는 70대 김 작가. 그는 몇 년 전 뜻밖의 선택을 하게 된다. “2018년 12월 31일, 그해의 마지막 밤이었죠. 머리를 때리듯 강하게 생각이 떠올랐어요. 일종의 계시 같은 느낌이었죠. 더 이상 물감이나 회화 도구를 사지 말자. 물감을 비롯해 색연필 등 남아있는 화구만을 사용해 작품 활동을 하자. 열심히 작업해서 물감을 소진하는 것이 결국 내가 남은 생을 열심히 소진하는 것이겠구나 했어요.”

‘물감 소진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말은 쉽지만, 작가에겐 굉장히 어려운 도전이다. 남은 생을 고려해서 화구를 아껴 사용하려면 페인팅은 흐리고 색이 옅어질 수밖에 없다. 색이 옅어지면 작품이 바래거나 탈색될 가능성이 있다. 화구를 골고루 소진하려면 특정 색을 선호하거나 어울리는 색을 골라 쓰기보다 남아있는 색의 상황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한정된 자원과 제한된 방법 내에서 작가 정신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결국 작품에 대한 고민은 더 치열해지고 고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물감 소진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작가는 부산과 서울의 국제갤러리에서 고생의 결과물들을 공개했다. 현재 한국 최고의 갤러리로 꼽히는 국제갤러리는 두 도시의 전시장을 할애할 정도로 거장의 복귀를 제대로 환영해 주었다.


김용익 ‘물감 소진 프로젝트 24-7:망막적 회화로 위장한 개념적 회화’. 국제갤러리 제공 김용익 ‘물감 소진 프로젝트 24-7:망막적 회화로 위장한 개념적 회화’. 국제갤러리 제공

김용익 ‘물감 소진 프로젝트 24-2:망막적 회화로 위장한 개념적 회화’. 국제갤러리 제공 김용익 ‘물감 소진 프로젝트 24-2:망막적 회화로 위장한 개념적 회화’. 국제갤러리 제공

이번 전시의 제목은 ‘아련하고 희미한 유토피아’이다. 물감 소진 프로젝트의 결과물인데 제목으로는 언뜻 연결되지 않는다. 오랜만에 언론과 만났다는 김 작가는 물감 소진 프로젝트와 전시 제목에 담긴 고민과 메시지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해 주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류를 유토피아로 인도할 것이라는 꿈, 이게 바로 모더니즘입니다. 일부 실현되었지만, 그 달콤한 열매는 인류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죠. 계급 격차와 자본주의, 자연의 훼손이라는 재앙적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저 역시도 어릴 때 상상도 하지 못한 풍요로운 삶을 살았고 모더니즘이 제공한 달콤한 열매에 중독돼 있었습니다. 그것을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희미해지는 유토피아’라는 제목이 나왔습니다.”

물감 소진 프로젝트는 소비와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하는 방법이었다. 생태학적인 페인팅인 셈이다. 인류가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미술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 작가는 치열하게 고민했고,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길이었다.

남아있는 물감을 골고루 소진하기 위해 작가는 캔버스의 면을 여러 개로 나누고 기하학적인 도형을 넣었다. 얇게 발린 물감, 다양한 색감, 기하학적인 무늬까지 자칫 정리되지 않고 어수선하게 보일 수 있지만,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한 건 작가의 내공이다.


김용익 ‘물감 소진 프로젝트 24-14:망막적 회화로 위장한 개념적 회화’. 국제갤러리 제공 김용익 ‘물감 소진 프로젝트 24-14:망막적 회화로 위장한 개념적 회화’. 국제갤러리 제공

김용익 ‘절망의 미완수 22-1’. 국제갤러리 제공 김용익 ‘절망의 미완수 22-1’. 국제갤러리 제공

“물감 소진을 위해 도형이라는 조형적 특성을 생각했지만, 그 이면에는 우주 원리가 깔려 있어요. 이걸 이야기하자면 몇 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주역과 정역이라는 책을 보면, 미래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상징적인 형태가 나옵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개념에서 원과 사각형이 구성되었고 아홉 개의 원은 음과 양의 조화를 의미하죠.”

길어지는 작가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마치 동양철학 수업을 듣는 듯하다. 작가의 개념이나 구성 원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국제갤러리 부산점의 큰 전시장은 100호가 넘는 대작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 즐겁다. 대형 회화를 조각처럼 전시장 바닥에 세우고 작가의 시그니처 시리즈인 자신의 땡땡이 작품이 물감 소진 프로젝트와 만나 새롭게 변신했다. 멈추지 않고 죽을 때까지 새로운 것을 보여주겠다는 거장의 귀중한 시도이다.

이번 전시는 4월 21일까지 이어진다.


김용익 ‘포장되고 지워진 유토피아 #16-2’. 국제갤러리 제공 김용익 ‘포장되고 지워진 유토피아 #16-2’. 국제갤러리 제공

김용익 작가가 물감 소진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효정 기자 김용익 작가가 물감 소진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효정 기자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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