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봄
이성부(1942~2012)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시집 〈우리들의 양식〉(1974) 중에서
간절히 바라는 것은 얼마나 눈물 나게 하는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에 절절함은 증폭되고 가슴은 바싹 타 버석거린다. 오랜 고통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간절한 대상이 찾아오면, 너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 없’고,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말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간절한 대상이, 아니 간절함 자체가 내 생명을 좌우하는 관건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간절함을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오’는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딜지라도 마침내 오고야 말 대상이 간절함이라면 이는 운명이기에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라는 표현은 간절함의 추구를 운명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에 대한 상찬이다. 하여 ‘봄’은 고통에 빠진 민중이 간절히 바라는 구원의 상징이다. 김경복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