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검정고시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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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간 아들이 보낸 편지를 읽지 못해 눈물 흘렸다던 70대 할머니가 검정고시를 통해서 글을 배워 손자에게 편지를 쓰고, 대학까지 진학했다는 인생 스토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공부하고 싶었지만 가난 때문에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의 애절한 사연은 지금도 전혀 낯설지 않다. 1950년부터 시행된 고졸 검정고시는 가난 등 여러 이유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인생 두 번째 기회였다. 1960~1980년대만 해도 어린 동생을 책임졌던 고무공장 여공과 버스 안내양, 신문 배달·구두닦이 소년 출신 검정고시 수석 합격자들의 이야기가 ‘주경야독’이란 제목과 함께 신문과 TV 뉴스를 장식했다.

이처럼 가정형편이나 병환 등을 이유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던 이들을 위한 검정고시의 취지가 최근 퇴색하고 있다고 한다. 상위권 대학과 의대 진학을 노리고 고등학교 1학년부터 일찌감치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명 의대 정원 확대는 이런 세태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고교 자퇴→검정고시→수능’이 상위권 대학 진학 코스로 등장한 상황이다. 덕분에 검정고시 전문학원이나 검정고시 코스를 개설한 재수종합학원이 문전성시다.

다음 달 6일 치러지는 2024년 1회 고졸 검정고시에 응시한 10대 학생(13∼19세)이 1만 6332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2022년 4월 1만 2051명에 비하면 2년 새 35%가량 늘었다. 검정고시 출신자들의 수능 응시는 지난해 수능에서 1만 8200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최상위권 내신 성적을 얻지 못하면 자퇴한 뒤 수능에 올인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물론, 학교폭력 피해와 질병 등 피치 못할 사정을 품은 10대들도 많겠지만, 내신 경쟁이 치열한 대도시권 고교에서 수능 올인을 위한 자퇴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성적으로 대학이 결정되는 현 입시제도, 입시기관으로 몰락한 공교육, 대학 서열주의…. 어른들의 잘못으로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경험을 포기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자신의 꿈과 행복을 좇을 다른 길은 없을까. 최근 농촌 지역 검정고시 시험장에는 어르신 수험생을 위해 시험 문제 글자를 키운 ‘확대 문제지’를 마련한다고 한다. 학생이 학교를 버리는 입시 문제도 더 크게 확대해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암울한 현실을 바꾸지 못하면 사회의 공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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