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암약하는 몰카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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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카메라를 이용한 TV 프로그램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시절이 있었으니 1990~2000년대가 그때다. 재미 삼아 특정인의 행적을 몰래 찍어 반응을 관찰하는 영상 콘텐츠의 인기는 상당했다. 촬영 대상의 행동에서 진솔함과 인간적 면모를 보는 데서 시청자들은 일종의 즐거움을 느꼈다. 이때부터 회자된 축약어가 바로 ‘몰카’다. 하지만 당하는 사람이 괴롭다면 보는 이의 재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촬영 방식이 합법적이라 해도 시청자들이 불편하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몰카에 대한 호불호는 갈리기 시작했고, 2010년대 들어 몰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부정적 방향으로 선회한다.

몰카는 방송 콘셉트로 시작된 말이지만, 불법 촬영을 뜻할 때의 몰카는 전혀 다른 용어다.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거나 성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몰카는 엄연한 불법이다. 그 심각성이 처음으로 대두된 게 1997년이었다. 당시 서울 신촌 그레이스백화점 여자 화장실에서 초소형 카메라가 발견돼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번창과 호황을 누리던 백화점이 한순간에 무너질 만큼 파장이 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이후로 성범죄 몰카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몰카 안전지대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메라 크기는 더 작아지고 영상의 화질은 점점 좋아졌다. 덩달아 몰카 범죄도 지하철, 화장실 같은 공공장소는 물론 숙박업소나 집 등 개인적이고 은밀한 장소로 광범위하게 확산 중이다. 형태도 다양한 변신을 거듭해 손목시계, USB, 라이터, 볼펜, 안경, 화분, 각 휴지, 담뱃갑, 커피 컵 뚜껑까지 일상의 물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초소형 몰카는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클릭 몇 번이면 손쉽게 구입이 가능하다. 최근에는 전자상거래 시장도 급성장해 해외직구 사례도 크게 늘어나는 실정이다.

몰카의 음흉한 ‘암약’은 새삼스럽지 않으나 최근 사전투표소에 불법 카메라를 설치한 40대 남성이 구속되면서 다시 부각되고 있다. 몰카(법적 용어는 ‘변형 카메라’) 판매와 구매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다양한 범죄에 악용될 위험성이 높은데도 현실적으로 규제할 방법이 없는 게 문제다. 이번 투표소 몰카도 마땅한 단속 근거가 없다고 한다. 2015년 이후 변형 카메라 규제 법안이 여럿 발의됐으나 단 하나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해서다. 더 이상 손을 놓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카메라 매매 기록 등 최소한의 관리 대책을 세워 범죄 피해 확산을 막아야 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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