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MoCA, 오늘 만나는 미술] 고전회화가 첨단기술을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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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베르하스트 '정지된 시간'

알렉스 베르하스트 '정지된 시간'.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알렉스 베르하스트 '정지된 시간'. 부산현대미술관 제공

현대미술은 다양한 형식과 기법을 차용하여 새로운 인지적 경험을 제공한다. 첨단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거나 관객이 직접 참여하여 완성하는 형태의 미술작품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부산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알렉스 베르하스트(Alex Verhaest, 1985-)의 ‘정지된 시간’은 고전 회화의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관객이 작품 속 인물과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제작된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다. 작품은 가족의 공동 초상화인 ‘저녁식사’, 개인의 초상인 ‘인물연구’, 그리고 정물화인 ‘테이블 소품’으로 구성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16세기 독일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 1472-1553)의 초상화와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페테르 클라스(Pieter Claesz, 1597-1660)의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의 시각적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바니타스’란 죽음과 허무를 나타내는 말로.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 일시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의 무가치함을 뜻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작품은 감상자가 가족 초상화 속의 인물인 피터에게 전화를 걸고 작품 속에서 벨소리가 울린 후부터 시작되고, 가족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이야기의 시점은 가장인 아버지가 자살한 사건이 발생한 직후로, 작가는 이러한 비극을 대하는 가족구성원들의 미묘한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의 대화는 ‘가장의 죽음’이라는 크나큰 사건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무덤덤하게 들린다. 의외로 이 사건은 그들에게 일상을 뒤흔들 만큼의 가치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처럼 기괴하리만치 단절된 가족들의 모습을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인물들의 묘사에 있어 정교하고 섬세한 왜곡을 가했다. 덧붙여 부패된 음식들의 정물인 ‘테이블 소품’은 인물들 내면의 알레고리로써 바니타스 회화를 변주하여 작품의 주제의식을 더욱 극대화했다. 작가는 고전회화와 최신 미디어 기술의 미학을 혼합하면서 현대인들의 의사소통에 내재된 아이러니함을 은유하고자 했다.

알렉스 베르하스트는 암스테르담과 브뤼셀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주로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작업하는 멀티미디어 아티스트이다. 그는 언어를 이용한 소통의 본질적인 한계를 다루는 작업들을 해왔다. 특히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정지된 시간’은 인간과 예술, 그리고 기술의 복합적 관계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으며, 고전적 회화와 비디오를 병치하거나 합성하는 작가 특유의 방식이 잘 드러나는 대표작품이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는 2020년 ‘오늘의 질문들’전에 이 작품을 출품하여 관람객들의 많은 호응을 이끌어낸 바 있다.

이해리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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