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온 덕성원 피해자 “후원자가 데려가면 다시 못 봐”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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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원회 조사 참여차
30년 만에 피해자 부산서 모여
강제 해외입양·후원 모금 의혹
“국가가 나서서 진실 밝혀야”

22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를 받기 위해 미국에서 부산을 찾은 공 모 씨가 부산 동구 형제복지원사건 피해자종합지원센터에서 본보 취재진과 만났다. 이재찬 기자 chan@ 22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를 받기 위해 미국에서 부산을 찾은 공 모 씨가 부산 동구 형제복지원사건 피해자종합지원센터에서 본보 취재진과 만났다. 이재찬 기자 chan@

1960~1980년대 인권유린의 온상으로 알려진 아동 수용시설 ‘덕성원’(부산일보 2024년 2월 2일 자 11면 등 보도) 피해자들이 진실 규명을 위해 다시 부산을 찾았다. 진실을 알리겠다는 열망으로 미국에서 부산을 찾은 전 덕성원 원생을 비롯해 30년 만에 피해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용기를 내 세상에 나선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지옥 같은 삶의 기억을 딛고 진실 규명을 촉구하기로 다짐했다.

22일 낮 12시 부산 동구 초량동 형제복지원사건 피해자종합지원센터. 〈부산일보〉 취재진은 이곳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를 받기 위해 미국에서 부산을 찾은 공 모(38) 씨를 만났다.

공 씨는 덕성원에서 학대당한 마지막 세대다. 그는 “덕성원에 들어오기 전, 저와 오빠는 부산역에서 발견돼 다른 보육시설에서 지냈다고 들었다”며 “오빠가 덕성원으로 간 뒤 2년이 지난 1991년, 7살이었던 저는 갑자기 차에 태워져 덕성원으로 보내져 폐원되기 전까지 덕성원에서 생활했다”고 눈물을 흘렸다.

공 씨는 “초등학교 때 도움이 필요하다고 방으로 갔더니 설립자 서 모 씨가 침대에 누워 있었고, 노환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성기를 씻겨야 했다”며 “강제로 시킨 화장실 청소를 하다 깨진 벽돌에 손가락이 찢어졌는데 아무런 조치를 받지 못해 두 손 새끼손가락 길이가 다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중학생이 돼서는 생리대를 한 달에 한 개만 지급해 친구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빌려달라고 부탁해야 했다”며 “학교에서 돌아오면 깻잎 1000장을 따야 했으며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아 항상 감기에 걸려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덕성원에서 해외 입양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공 씨는 “후원자라는 사람이 와 사진을 찍고 한 명씩 데려갔는데, 그렇게 나가면 다시는 볼 수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로 입양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후원자에게 감사 편지도 썼는데 정작 직접 받은 돈은 단 한 푼도 없다”고 말했다.

공 씨를 포함한 피해자들은 이날 오후 6시 해운대구 중동 한 식당에서 본격적인 첫 모임을 가졌다. 각지에 흩어져 살아가던 피해자들은 생업을 끝내고 이곳을 찾아 30년 만에 서로를 마주했다. 피해자 대부분에게는 이날이 서로 얼굴을 확인하는 첫날이었다.

어린 시절 함께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얼굴에 새겨진 주름만큼 각기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 몸과 마음에 새겨진 덕성원에서의 상처를 공유하며 생지옥과 같은 삶을 감내해야 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이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덕성원에서 일어난 노동 착취와 폭행, 해외 입양에 대한 기억을 퍼즐 맞추 듯 맞춰갔다.

이들은 정부 차원에서 직권조사를 해야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덕성원피해생존자협의회 안종환 대표는 “인권 유린 역사는 여야 정치적 이념을 넘어 풀어야 할 숙제”라며 “음지에서 살아야 했던 이들의 아픔을 더 이상 무시하지 말고 국가가 나서 진실을 밝혀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양보원 기자 bogiz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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