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들여다보기] 400주년 맞은 조선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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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400~500명 규모 막부 '극진히 대접' 엄명

1748년 10번째 조선통신사가 에도성에서 국서를 교환하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그린 '조선인래조도'.

올해 400주년을 맞는 조선통신사는 1607년(선조 40년)에 시작해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일본에 갔다. 평균 18년 만에 한 차례씩 갔다.

조선통신사가 내왕했던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패권을 잡았던 도쿠가와(德川) 집안의 에도시대(1603~1867년)에 해당한다.

애초 조선과 일본이 사신을 주고 받은 것은 1404년 태종 때부터였고,통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1428년 세종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왜 1607년을 조선통신사의 기점으로 삼고 있을까? 그것은 임진왜란 직후 한일간의 상처를 씻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었던 것을 크게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조선통신사는 새로운 화해의 시대를 열었던 상징인 것이다.

초기 3차례의 사절 명칭은 (조선)통신사가 아니라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였다. 사절은 일본 측의 요청에 대한 답으로 보내는 것이고,조선의 주 목적은 임란 때 끌려간 조선 포로를 귀환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명시했다.

하지만 일본 측 추정으로 5만~6만명에 이르는 포로 중 3차례에 걸쳐 조선으로 돌아온 이들은 총 7천600여명에 불과했다.

일본이 성의를 보이지 않은 데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조선 포로들도 일본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극히 일부만 돌아왔다.

조선이 조선통신사를 파견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조선은,북방이 명청 교체기에 들어 어수선하자 남방의 일본 쪽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어 일본의 통신사 파견 요구에 응했다.

한편으로 일본의 막부는 "통신사를 지극히 대접하라"고 60여개 번에 명령을 내려놓고 이를 어길 때는 가차없이 영주를 처단하는 것을 통해 막부의 통제력을 확보해 나갔다.

조선통신사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한·일 국내외 상황의 절묘한 균형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조선은 1636년 병자호란을 겪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할 즈음 대일외교에 더 큰 비중을 두었는데 1636년 4번째 사절 파견 이후부터 정식으로 '통신사' 명칭을 사용했다.

조선통신사는 400년 전의 한류를 구가했다. 조선통신사 사절은 한 차례 400~500명에 달했으며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이 속해 있었다.

일본의 지식인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사절단을 찾아와 "가보로 남기겠다"며 글씨를 써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조선통신사 길은 남방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는데 그 길을 통해서 17세기에 고추와 담배가,18세기에 고구마가 조선에 들어왔다.

그 길은 중국 '연행사의 길'과 함께 당시 조선이 세계로 통하는 두 갈래 길의 하나였다.

최학림기자 theos@busanilbo.com 조선통신사 파견시기






















































회

서기(조선연대)

1

1607(선조40) 

2

1617(광해군9)

3

1624(인조2) 

4

1636(인조14) 

5

1643(인조21) 

6

1655(효종6) 

7

1682(숙종8) 

8

1711(숙종37) 

9

1719(숙종45) 

10

1748(영조24) 

11

1764(영조40) 

12

1811(순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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