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니 밖으로 나와,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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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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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삼일포/김연수


눈 내리는 삼일포/김연수 눈 내리는 삼일포/김연수

표제작 ‘눈 내리는 삼일포’는 궁궐의 어의에게 덕암이라는 추레한 사내가 찾아오며 시작한다. 학질에 걸려 죽어가는 딸을 위해, 귀한 약재를 달라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가진 게 변변찮은 그는 어의에게 유명 화가 현재의 그림을 꺼낸다. 그림은 좀이 슬어 구멍이 뚫려 있었다. 어의가 거절하자 덕암은 그림이 망가진 게 아니라, 현재가 일부러 구멍을 뚫어 완성했다는 기막힌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에 넘어간 어의는 그림을 받고 약재를 내어준다. 하지만 이 소설 결론 부분에 이르러 덕암이 지어낸 이야기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게다가 덕암은 평소 소설을 ‘미혹(迷惑)’이라고 경멸했다. 소설을 그토록 경멸했던 사람이 소설을 써서 딸을 살려냈으니….

이 소설이 만들어진 이야기가 또 한 편의 소설 같다. 조선 후기 화가 심사정의 그림 ‘고성삼일포도’는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그림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좀이 슬어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 이수지 작가는 여기에 영감을 받아 구멍들을 하얀 눈송이가 날리는 겨울 풍경으로 상상해 그림책으로 만들었다. 저자가 이 그림책을 보고 써 내려간 이야기가 ‘눈 내리는 삼일포’다. 세월이 흘러 그림은 망가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새로운 그림과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등단 30년이 넘는 김연수 작가는 4년 만에 아홉 편의 작품이 실린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를 냈다.

소설집에 실린 첫 번째 단편은 ‘우리 인생의 목격자’다. 지인이 전화를 걸어와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지쳤다. 다 끝났는데 자신만 모르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주인공인 나는 그에게 “밖으로 나와, 밖으로”라고 위로를 건넨다. 그는 만나자는 말로 오해해 “어디서 볼까요”라고 물어와 만나기로 한다.

이 소설에는 한국 최초의 여자 야구선수인 안향미 선수가 모티프가 된 내용도 등장한다. 주인공 이선희는 어린 시절부터 투수를 꿈꿨다. 그는 미국에서 여자 프로 야구가 출범하고, 한국인 선수들이 지명받는 모습을 보며 어릴 적 꿈을 떠올린다. 비록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또 이루지 못한 것도 아니게 됐다. 보이지 않는 것을 애써 보려 할 때 상상도 못 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각자의 오해와 이해, 당시의 최선과 다시 쓰는 최선을 반복하며 삶을 이어 나갈 것을 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저자는 “누군가가 ‘이제 모든 게 끝났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끝이 아니고 과정일 수 있다. 어떤 일이 끝이냐 과정이냐는 자기 인생을 어떤 이야기로 믿고 바라보느냐에 달렸다”라고 말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저자는 이에 대해 “누군가 자기 인생을 되게 형편없는 이야기로 여긴다면 이를 얼마든지 다른 버전으로 고쳐 쓸 수 있다는 것을 소설로써 알려주고 싶었다”라고 답한다.

중요한 것은 인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일을 바라보는 눈이다.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그때의 자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이 생긴다. 세상이라는 그림 속에 갇혀 스스로 만든 지옥 속에서 살지 말아야겠다. 작가는 “가을이니 밖으로 나와, 밖으로”라고 사인과 함께 맨앞에 적었다. 김연수 지음/문학동네/296쪽/1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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