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신부가 구출한 수백 명의 한국 아이들[김백상의 레알 4편 1부]
아동학대 악명 높은 재생원·영화숙
굶주림·폭행·성범죄 등 지옥 같은 수용소
아이들의 죽음에 분노한 백인 신부
어린 소녀의 죽음 목격하고 악에 맞서기로
언제나 어디선가 사건과 사고가 일어납니다. 일부만이 세상에 알려져 역사로 기록됩니다. 산업화 이후 부울경에서 벌어진 많은 일 중, 기억하고 되짚어야 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기록합니다. 실화입니다만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극단적인 사건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집중했습니다. [편집자 주]
13살 김 군은 부랑인 수용 시설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수백 명의 아이들이 감금된 곳이었다. 끼니는 부실했고, 관리자의 폭행과 가혹 행위가 일상이었다.
도주는 실패로 끝났다. 소대장이라고 불리는 관리자들이 곡괭이 자루와 몽둥이로 김 군을 무차별 폭행했다. 김 군이 실신하자, 찬물을 끼얹어 강제로 깨우며 매질을 이어갔다. 김 군의 다리뼈가 부러졌다.
이후 상태가 악화되자 김 군은 가까운 행려 환자 구호소로 옮겨졌다. 외국인 신부가 운영하는 임시 병원이었다. 폭행 후유증과 장기간의 방치로, 결국 김 군은 영원히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불구’가 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어릴 적부터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제’라는 구체적인 꿈이 있었다. 부산일보DB
판잣집의 백인 신부
소 알로이시오 신부는 1930년 미국 워싱턴 중산층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신부, 정확히는 선교 신부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어렸지만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제’라는 구체적인 꿈이 있었다.
학사 시절엔 다니던 미국 메리놀 신학교에서 벨기에 선교 협조자회로 적을 옮겼다. 메리놀회는 안락하고 풍족한 생활이 가능한 가톨릭 내 주류 학회였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 가까운 학교로 찾아간 것이다.
사제가 되기 전, 그에게 최종 선교지로 두 나라가 제안됐다. 태국과 한국. 한국을 택한 이유는 6·25전쟁 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1957년 알로이시오 신부는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 땅을 밟게 됐다. 부산 교구 소속으로 발령 났고, 사목지는 서구 송도였다. 피난민과 판자촌이 많던 곳이었다.
알로이시오 신부의 자서전 등에는 그가 느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안쓰러움, 현실의 갑갑함 등이 기록돼 있다.
“임종이 가까워진 한 할머니에게 종부성사를 주기 위해 어떤 판잣집을 찾았다. 미국 가정의 화장실 크기도 안 되는 단칸방 구석에 누워 있었다. 할머니, 아들, 며느리, 두 손자 그리고 파리 떼와 함께 살고 있었다…<중략>…돌아오는 길에 격렬한 증오심이 솟구쳐 올랐다. 미국의 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국에선 한 해 10억 달러 이상을 개를 먹이는 데 사용한다. 개들도 비바람을 피할 집도, 뛰어놀 뜰도, 치료해 주는 병원도 있는데….”
선교 신부였지만 선교보다는 구호에 집중한 사제였다. 여기저기 돈을 얻어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집중했다. 수년간 가난한 부녀자들을 모아 자수 손수건을 만들고, 이를 미국에 우편으로 보낸 뒤 기부금을 받는 사업을 했다. 인기가 좋아 기금도 제법 모이고, 부녀자들의 살림에도 꽤 도움이 됐다고 한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1964년 가족 단위 고아원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무료 진료소를 짓고 늘렸다. 1967년엔 아예 성당 주임직을 그만뒀다. 구호사업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4년 9개월 간 가난한 이웃과 마찬가지로, 성당 근처 판잣집에서 살기도 했다. 성당 형편 등을 고려해 본인 사제관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지독한 냄새와 추위로 고생했다. 특히 장마철 야외 화장실 가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이미 진창이 되어버린 6m 마당을 쏜살같이 가로질러 변소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중략> 머리 위에는 빗물이 똑똑 떨어지고 판자로 된 변소 벽이 곧 쓰러져 버릴 것처럼 흔들거리며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직접 판잣집에서 생활하며 가난한 이웃을 도왔다. 부산일보DB
알로이시오 신부가 아동보호시설에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일화가 자서전에 나온다.
중풍과 정신질환을 앓던 50대 신자를 찾아갔다. 곧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판잣집도 없던 그는 어느 공장 작업장 구석에 누워 있었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 일로 바빴다. 신도 옆을 지키는 이는 6살 아들이었다. 죽어가는 아버지가 목말라하면 옆에서 물을 떠주며 병 수발을 들고 있었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숱하게 봤지만, 그렇게 지저분한 곳에서 아무 힘도 없는 아이가 죽어가는 아버지를 뒷바라지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신도는 며칠 뒤 죽었다. 소 신부는 남은 아들에게 식모살이를 간 13살 누나가 있다는 것을 알고, 라디오방송까지 하며 누나를 찾았다. 또 구두닦이를 하며 거리 생활을 하는 11살 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부랴부랴 그 형의 소재를 파악해 보니, 단속에 걸려 어느 고아원에 수용됐다. 알로이시오 신부가 형을 데려오려 하자, 고아원 원장은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때 고아원에서 나온 11살 형의 모습은 “빼빼 마른 팔과 다리, 움푹 들어간 가슴, 튀어나온 배는 영양실조의 전형”이었다. 또 알로이시오 신부를 보며 극도로 긴장하며 경계했다. 한국의 아동 수용 시설 다수가 아이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실감했다.
1960년대 영화숙·재생원의 외관.
대부라 불린 원장
이순영 원장은 장교 출신이었다. 1954년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해 소위로 임관하고, 1957년 중위로 전역했다. 그리고 1962년 부산 서구의 영화숙을 인수하고 원장이 됐다. 영화숙은 원래는 전쟁 고아 20~30명을 돌보는 작은 민간 보육원이었는데, 이순영 원장이 취임하고 완전히 바뀌었다.
1961년 들어선 박정희 군사정부는 사회정화 사업으로 부랑자 단속 정책을 펼쳤다. 이에 부산시는 부랑자 수용시설 재생원을 짓고, 1962년 운영을 영화숙 법인에 위탁했다. 부랑자 단속 권리도 줬다. 이렇게 재생원과 영화숙은 합처져, 사하구 장림동 일대에 최대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 시설이 들어서게 됐다.
수용자 1명당 국가 보조금이 나오기 때문에, 부랑자 수용시설은 수익성 높은 사업 아이템이 될 수 있었다. 이순영은 탄탄한 인맥을 동원해 위탁 운영을 따낸 것으로 보이다. 영화숙 이사진에는 부산시청, 경찰, 국세청 출신들이 이름을 올렸다. 1962년 당시 재선 부산 국회의원이자 이순영의 친형 이종남도 영화숙 이사였다.
이순원은 그곳에서 ‘대부’라고 불렸다. 군인 출신답게 소대장, 중대장 등으로 불리는 관리인을 지정해 나머지 수용자를 통제하는 체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재생원과 영화숙은 군대라기보다 무법 상태의 감옥이나 전쟁포로수용소에 더 가까웠다.
아이들은 단속인원들이 데려왔다. 거리에서 신원이 불분명한 아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2025년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등에서 확인되듯 거리에서 신문을 돌리거나 구두를 닦는 등의 일을 하다 끌려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납치도 있었다. 수용 당시 이름을 바꿔 기입해 부모가 찾아와도 돌려보내지 않은 사례도 있었다.
“밥 사주겠다는 남자를 따라갔다가 끌려갔습니다. 집 주소, 부모 이름, 다니는 학교와 담임선생님 이름까지 정확히 진술했지만, 가족에게 연락해주지 않고 강제 수용되었습니다.”
- 수용자 증언 중 일부.
재생원과 영화숙에 수용된 아이들.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아이들은 감금 생활을 했다. 재생원은 성인, 영화숙은 아동 시설이었지만 실제로 구별이 모호해 뒤섞인 경우가 많았다. 수십 명이 좁고 비위생적인 몇 평의 방 안에서 지냈다. 방문은 밖에서 잠갔고, 방 안에는 대변통과 소변통이 있었다.
식사는 보통 하루 두 끼였다. 그나마도 멀건 시래깃국이나 강냉이죽 등이었다. 수용자들의 공통된 증언이 “극심한 배고픔”이었다. 버려진 음식물이 보이면 주워 먹는 게 일상이었다. 버려진 복어를 들고 와 나눠 먹다가 그날 밤 다 같이 죽는 걸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다.
교육받을 권리는 박탈됐다. 방 안에 갇혀 지냈고, 일할 수 있으면 외부 토목공사 등 강제노동에도 투입됐다. 소대장 등의 구타와 체벌은 당연시됐다. 아무도 제어하지 않으니, 수용자들은 뼈가 부러지거나 정신을 잃어도 계속 맞는 일이 흔했다.
죽음도 흔했다. 아파도 치료 없이 방치됐다. 비위생적인 환경, 열악한 영양 상태에서 많은 아이들이 쓰러져 나갔다. 맞다가 죽은 이도 있었다. 제대로 된 장례조차 없이, 사망자들을 뒷산에 암매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얼마나 죽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기철이라고 저하고 동갑내기입니다. 얘가 지병은 좀 있었어요. 또 치료를 안 해주지 않습니까. ‘어, 기철아 잘 자’ 하고, ‘어 그래, 너도 잘 자라’ 이러고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기상 시간이 됐는데 다 일어나는데 얘가 안 일어나…소대장이 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죽었네’. 그리고 재생원 어른들이 와서 얘를 데리고 나가는 것까지는 제가 직접 목격을 했습니다.”
- 수용자 인터뷰 중 일부 (기철이는 뒷산에 암매장됐다고 한다.)
성범죄도 일상적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선 성폭행 7명, 성추행 4명의 피해자를 직접 확인했다. 수십 년 뒤 조사다 보니 확인이 안 될 뿐 실제 규모는 짐작하기 어렵다. 피해자와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주로 중대장, 소대장 관리들이 취침 시간에 어린아이를 성폭행하고 반항하며 구타하는 식이었다.
결국 재생원과 영화숙은 통제 불능의 교도소나 포로수용소 같은 곳도 아니었다. 아이들에겐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아픈 이들을 위한 구호소를 짓고 운영했다. 부산일보DB
고발과 타협
알로이시오 신부는 1968년 무료 교육기관 아미고등공민학교를 세웠고, 1969년에 ‘행려환자구호소’를 인수해 운영했다.
구호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재생원이 있었다. 군대 막사 같은 그곳이 아동 수용소이고, 밤마다 비명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알게 된 뒤 소 신부는 구실을 만들어 재생원을 몇 차례 방문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자서전에서 이순영을 “불도저 같은 몸집에 험악한 인상이었는데 웃을 때도 찬 기운이 흘렀다”고 묘사했다. 한 방에 50~60명의 아이들이 양반다리를 하고 앞 사람 뒤통수만 쳐다보고 앉아 있고 소대장 등이 몽둥이를 들고 감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재생원을 “공포의 수용소”라고 했다.
재생원에서 위독한 수용자를 구호소에 보내기도 했다. 어느 날 소 신부는 재생원에서 아파 보이는 어린 소녀를 구호소에 데려와 진찰을 했다.
“소녀는 수척한 몸에 말기 상태의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나는 그 어린 소녀의 삶을 체념한 듯한 애처로운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 소녀의 슬픈 눈이 떠올라 나를 괴롭힌다. 소녀는 희망원에서 1년 넘게 살았는데 치료나 간호를 전혀 받지 못했다고 했다.”
소녀는 이틀 뒤 숨졌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아이들을 위해 나서기로 결심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재생원의 불법 사실을 모아 보고서를 만들었다. 부산시 보건사회국장을 만나 전달했지만, 그는 무관심했다. 경찰서장은 화를 내면서 “손을 떼라”며 겁을 주었다. 부산시장도 만났지만, 역시 무관심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대통령, 국무총리, 내무부 장관, 검찰총장, 보건부 장관 등 닥치는 대로 보고서를 보내고 일을 키웠다. 부산시에선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현했지만, 중앙정보부에서 관심을 보이자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1971년 4월 알로이시오 신부를 비롯해 성직자 22명이 이순영을 고발했다. 도망치다 잡혀 매질을 당해 불구가 된 김 군의 증언 등을 모아 고발장을 작성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고 그해 6월 이순영은 구속됐다.
끝이 아니었다. 구속 8일 만에 이순영은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다. 오히려 알로이시오 신부를 무고죄로 고발하고, 사람을 붙여 감시하고, 위협을 가했다. 결국 알로이시오 신부는 아이들을 꺼내 오기 위해 그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2부에서 계속-
<주요 참고 문헌>
소 알로이시오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 2009. 11.
국제신문 <부랑인 시설 인권유린 증언> 시리즈 2023. 2.
가톨릭신문 <부산 신부 23명, 영화숙 원장을 고발> 1971. 4. 25.
KBS 시사직격 < 지옥에서 살아남은 소년들 > 2023. 3.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