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인+간)] 전창진 부산 KT 감독 파란만장 농구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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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 다시 튀어오르는 공처럼 연이은 고난에도 주저앉지 않았다

부산 KT 전창진 감독이 부산 사직체육관 관중석에 앉아 지나간 3년을 회상하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안녕하세요. 부산일보사 스포츠부 남태우 기자입니다.

오늘은 프로농구 부산 KT 전창진 감독을 만나보겠습니다. 전 감독은 최근 KT와 3년 재계약을 했습니다.

이미 지난 3년간 감독을 했으니 추가 임기를 다 채우면 6년을 하게 됩니다.

부산에는 프로농구 외에 프로야구, 프로축구 팀도 있지만 내리 6년 연속 지휘봉을 잡는 경우는 전 감독이 처음입니다.


-농구를 언제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서울 상명초등 4학년 때였어요. 조회 시간에 농구 감독이 찾아와 대뜸 "농구 한 번 해 보지 않을래"라고 물으시더군요. 저는 그때 키가 1m62로 제법 컸죠. 평소 오렌지색 농구부 유니폼이 멋있다고 생각했고 괜히 농구가 좋아 보여 하고 싶던 참이었죠.

제가 농구를 한다고 했는데도 부모님이 반대를 안 하시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중앙대 재학 때까지 농구선수 생활을 하셨답니다. 아버지는 농구 이야기를 그때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농구 유전자가 몸 안에 있었던 것이죠. 






고3 때 가세 기울어 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운동

고려대 거쳐 실업팀 입단했지만 부상 불운 덮쳐

하강곡선 그리다 결국 짧은 선수생활 은퇴

삼성전자 팀 매니저로 선수들 뒷바라지 10년

2002년 해체 위기 TG 감독 맡아 우승 이끌어


그때 우리 집은 굉장히 부자였어요. 아버지가 주유소를 하셨는데 당시 우리나라에 20대밖에 없다던 외제 자동차까지 있었으니까요. 상명초등은 부잣집 아들이 많이 다니던 사립학교였어요. 인근 학교 육성회비가 300원일 때 우리 학교는 6천800원이었어요. 1970년대 초반인 데도 스쿨버스가 다녔고, 교실에는 난로가 아니라 스팀이 설치돼 있었죠.

-중학교 때 심한 부상을 당하셨다고

△초등학교 때 전국대회를 휩쓸다시피 하다가 용산중에 스카우트됐어요. 그때 '농구 선수를 본격적으로 해야지'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중학교는 다르더라고요. 초등학교 때는 연습을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아도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중학교는 아니었어요. 저는 선수라고 내놓을 만한 실력도 못됐죠. 선후배 관계는 물론 기율이 엄격했어요. 그때 운동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아! 운동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열심히 한 덕분에 2학년 때부터는 경기에 나갈 수가 있었어요.

호사다마라고 해야하나. 중3 때 제 농구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납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춘계연맹전이었어요. 배재중하고 준결승을 하다가 오른쪽 발목을 부러뜨렸어요. 6개월이나 깁스를 했으니 부상이 정말 심했죠. 당시만 해도 재활이니 뭐니 하는 개념이 없었어요. 그냥 깁스만 하고 있었죠. 깁스를 푼 뒤에는 하체 강화훈련한답시고 모래 주머니 차고, 줄넘기 하고, 계단도 뛰었죠.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고등학교 때는 집안 형편도 안 좋아졌다면서요

△고3 때 아버지가 연거푸 사업에 실패하셨어요. 고려대 1학년 때는 살던 집도 비워줬죠. 차비 구하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부잣집 아들이 갑자기 빈털터리가 됐으니 어땠겠어요. 점심은 늘 라면이었는데 공깃밥 하나 추가할 돈이 없어 국물만 마셨어요.

그때 저를 많이 도와주신 분도 계셨어요. 안암동 로터리에 있던 한 제과점 주인 사모님이 저를 도와주셨어요. 팔다 남은 빵을 먹으라고 많이 주셨고, 자기가 운영하는 당구장에서 당구도 마음껏 칠 수 있게 해 줬답니다. 그때 당구를 배운 덕에 실력이 제법 늘었어요. 당구장에 오는 손님들을 상대로 내기 당구를 쳐서 자장면을 뺏어 먹기도 했죠.

-대학교 때 농구는 어땠나요

△학교에서는 선배들에 밀려 경기에 뛰지도 못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해 농구를 그만둘 마음까지 먹었죠. 그래서 어머니께 "농구는 그만 하고 유학 가겠다"고 말씀드렸죠. 아버지께서 화를 내시더군요. 그러면서 "졸업을 하고 나면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하셨어요. 이듬해 아버지께서 그만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린 게 지금까지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2학년 때 겨우 주전이 됐어요. 다른 선배가 다쳐 빠진 덕분에 그 자리를 차지한 겁니다. 기회를 제대로 잡기 위해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요. 그래서 실력이 부쩍 늘었죠. 한·일대학대회 등에 국가대표로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농구는 왜 그만두셨나요

△이번에는 왼쪽 발목도 다치고 말았어요. 4학년 때 서서히 하강세로 접어들더군요. 졸업하면서 운좋게 삼성전자에 들어갔습니다. 첫해에는 신인상도 받았죠. 하지만 왼쪽 발목이 다시 문제가 됐습니다. 2년 동안 거저 놀았죠. 하는 일도 없이 밥만 먹고 월급만 축내니 부끄럽더군요. 그래서 은퇴하고 말았습니다. 그때까지 모아뒀던 상장, 트로피, 메달 같은 것은 모두 다 버렸어요.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아버지도 안 계신데 이제 무얼 해야 하나.

-그때 인생의 행로를 프런트로 바꾸셨는데

△삼성전자 이인표 단장님이 전화를 하셨어요. 다짜고짜 매니저 한 번 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시더군요. 당장 할 일도 없고 해서 좋다고 했죠. 저는 원래 한 번 일을 하면 죽도록 하는 스타일입니다.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도 정말 힘들더군요. 단장님은 철저한 분이었어요. 조금만 실수해도 난리가 났죠.

선수 스카우트는 기본이고 구단 홍보, 물품 관리, 선수단 관리 및 뒷바라지까지 다 했어요. 어린 선수들은 제대로 자는지 밤마다 방을 돌며 챙겼어요. 고참선수들은 술 먹으러 가지 말라고 일부러 소주 한 병하고 안주를 방에 넣어주기도 했죠. 쉴 틈도 없었고 퇴근은 꿈도 못 꿨어요. 숙소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위궤양까지 걸렸어요. 1988년에 매니저가 돼서 1997년까지 했으나 딱 10년이었네요. 저보고 선수들 마음을 너무 잘 안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매니저로 10년 정도 일하다 보니 저절로 터득이 되더군요. 

지난 2008년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한 전창진(왼쪽) 감독이 우승트로피에 입 맞추고 있다. 연합뉴스

-지도자 생활은 어떻게 하시게 됐나요

△1998년 초중고 선배인 최형길 원주 TG 사무국장님이 저더러 코치를 한 번 맡아보라고 하셨어요. 그러다가 2001-2002 시즌 도중에 최종규 감독님이 성적 부진 탓에 물러나시게 됐어요. 구단에서 저보고 감독대행을 맡으라고 하더라구요. 솔직히 부담도 되고 겁도 났어요. 그래도 도전할 기회가 마침내 왔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한 번 해보자고 다짐했죠.

의욕은 넘쳤지만 아무것도 몰랐죠. 지금 돌이켜보면 철 없이 감독 했던 것 같아요. 그나마 외국인 선수를 잘 뽑았고 주변 사람들과 의논을 하면서 팀을 꾸려간 게 큰 힘이 됐습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다른 감독님들께 물어보고 그랬어요. 

-처음에는 초보 감독에 대한 비난이 적지 않았다던데

전창진 감독이 지난 달 10일 부산 사직체육관서 열린 6강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선수들에게 고함을 치고 있다. 부산일보 DB

△감독이 되는 데는 솔직히 말해서 학연 덕도 봤죠. 용산고 선후배가 많았거든요. 용산고 마피아라고 불릴 정도였어요. 어쨌거나 감독 첫 시즌에 팀을 우승으로 끌어올렸어요. 그때 '주무 출신 주제에 좋은 선수 만나 우승했다'는 비아냥이 들리더군요. 저를 잘 아는 선배님들 중에서도 그런 말씀을 하는 분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들 때 정말 괴로웠죠.

-그때 팀 사정이 정말 엉망이었죠

△다른 구단 연간 예산은 50억~60억 원 정도였는데 우리는 25억~30억 원밖에 안 됐습니다. 해외 전지훈련은 꿈도 못 꿨죠. 춘천, 울산, 부산 같은 데를 돌면서 훈련하는 게 고작이었어요. 외상 밥값이 너무 밀려 식당에서 밥을 안 준다고 해 못 먹은 적도 있어요.

그래도 선수들은 의욕이 대단했어요. 매년 시즌 초만 되면 구단에서 우승 못하면 팀 해체한다 하니까 죽을 각오로 뛰었습니다. 2003-2004 시즌에 준우승을 하고 다음 시즌에 또 우승을 차지했어요. 그러다가 2005년에 팀이 원주 동부로 바뀌었습니다. 동부는 우리가 우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몇 년간 우승을 할 수 없었죠. 그러다가 2007-2008 시즌에 세 번째 정상에 오르게 됐어요. 사실 다른 구단에서 감독직 제의를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열심히 운동하는 선수들을 차마 배신할 수는 없더라구요. 그러다보니 세월이 흘렀습니다.


KT 부임 후 첫번째 작전은
'선수들과 친해지기' 
술자리 갖고 워크숍도 열고 
시간 지나니 자발적 훈련  
연승행진 원동력 됐죠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 
정신과 치료 받았는데 
부산 내려온 이후엔 싹~ 
구단·지역에 '빚'진 것 많아 
꼭 갚아야죠 좋은 경기로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병 치료까지 받으셨다고 하던데

△갑자기 머리와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서울 삼성병원에 가서 정밀검진을 받았어요. 다들 아무 이상이 없다고 그러시더군요. 그런데 저는 밥도 못 먹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서 괴로웠어요. '하느님, 도대체 왜 이러시냐, 도와달라'는 생각까지 났습니다. 그때 한 의사 분이 정신과 검진을 받아보라더군요. 처음에는 무시했는데 다른 의사들도 몸은 이상이 없다며 정신과에 가보라고 이구동성으로 그러시데요. 그래서 정신과에 갔어요. 질문을 한 500개 정도 하더라고요. 전혀 뜻밖의 질문이 이어졌어요. 그리고 나서 나온 진단이 뭔지 아세요. "당신 머리에는 1등밖에 없는 게 이유다." 한마디로 성적에 대한 지나친 스트레스라는 거죠.

그런데 최근에 그 증상이 없어졌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부산에 내려온 뒤로는 별 문제가 없어요.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

-부산에는 어떻게 해서 오시게 되셨나요

△KT 정선재 국장이 찾아 왔더군요. 다짜고짜 "감독님 도와주세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이미 다른 여러 구단으로부터 제안을 받아놓은 상태였어요. 그래서 정 국장에게 "너는 네 번째야"라고 놀렸어요. 처음에는 약간 당황했지만 "그래 좋아" 했죠. 정 국장과는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삼성에서 일할 때 정 국장은 한 스포츠용품업체 직원이었어요. 구단에 물품 협찬하는 일을 맡고 있었죠. 나중에 TG에 홍보대리로 왔더라고요. 삼성에서 홍보일을 할 때 배운 내용들을 가르쳐줬죠. 그때 서로 믿는 사이가 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KT 본사에서 농구단을 없애든가 아니면 제대로 하든가 하며 닥달을 했대요. 그래서 농구단 쇄신방안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고위층과 실무진 모두 '전창진 영입'을 제1 과제로 꼽았다고 하더군요.

-당시 KT는 만년 하위팀이라서 다들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전창진 감독이 지난해 11월 경기 도중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부산일보 DB
△처음에는 KT에 대해서 잘 몰랐어요. 다만 부상 선수가 9명이나 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죠. 선수들 훈련하는 데를 처음 갔어요. 다들 긴장하더라고요. 김승기 코치에게 기본 패턴 패스 훈련을 시켜보라고 했죠. 아, 그런데 이럴 수가 있나요. 명색이 프로라는 선수들이 그걸 못해요. 코트서 서로 부딪히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더군요. 얼마나 화가 나던지 정 국장에게 "안 되겠다, 돌아가야겠다"고 했죠.

제가 먼저 택한 게 선수들하고 친해지기 작전이었어요. 술을 잘 못 마시지만 술자리도 갖고 그랬어요. 같이 고스톱도 쳤어요. 워크숍도 열었죠. '이 훈련을 왜 이렇게 하는 거다'라는 것을 설명도 했죠. 시간이 지나니 선수들이 저를 따르고 훈련도 자발적으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저녁식사 시간이 6신데 훈련을 하다보니 8시까지 갔어요. 그래서 선수들 보고 "배고프지 않으냐"고 물으니 다들 괜찮대요. 서서히 선수들 마음가짐이 바뀌기 시작하더라고요. 여기에 연승도 하고 하니까 자신감을 갖게 됐고요.

-전 감독이 생각하는 농구는 어떤 것인가요

△저는 기초훈련을 중시합니다. 수비 기본동작은 물론이고 패스, 드리블 등도 연습시켜요. 어떤 선수들은 불만을 나타내죠. 초등학교 때 배우는 것 시킨다고. 하지만 이 기본기 훈련은 정말 중요해요. 실전에 큰 도움이 되죠. 선수들에게 가능하면 이해시키려고 합니다. 왜 이런 훈련이 필요한지.

저는 농구는 체육관에서만 생각하고 일상 생활에서는 가급적 생각을 안 하려고 해요. '나는 하루종일 운동만 생각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다 거짓말이라고 봅니다. 저는 책상 앞에 앉아 작전 구상하고 그런 스타일은 아니에요. TV를 보다 순간적으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려놓고 나중에 연습하고 그런 식이죠. 그리고 저는 빚을 지고는 못 살아요. 구단서 잘해주니까 보답해야죠. 무조건 우승해야 합니다. 못하면 나가야죠.

-부산은 야구도시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농구가 인기 스포츠로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제가 처음에 왔을 때보다 농구 팬이 많이 늘었어요. 올해 플레이오프 할 때 사직체육관에 연이어 관중 1만 명 이상이 들어왔어요. 저도 그렇고 선수들도 흥분했죠. 앞으로 농구 팬이 더 늘어날 거라고 봅니다. 다만 우리나라 스포츠 관람 문화는 조금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기든 지든 관계없이 운동장 가서 즐기는 문화가 정착해야 합니다.

아들이 미국 시라큐스대학에 다닙니다. 농구 명문학교죠. 아들 이야기가 지역 라이벌전 하면 3만 명이 간대요. 시라큐스 인구가 13만 명이거든요. 그러니 지역주민 4명 중 1명이 농구장에 간다는 이야기죠.

요즘 농구 인기가 옛날보다 못하잖아요. 프로농구 정책 방향이 틀린 데다 언론조차 농구 기사를 제대로 취급해 주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국내에서 각종 국제대회가 열려 대표팀 경기도 보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럴 기회가 없어요.  관중이 더 늘어나려면 구단 투자도 더 늘어야 합니다. 여기에 경기 수도 줄여야 해요. 그래야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에서 경기를 할 수 있잖아요. 대신 경기 시간을 늘이면 됩니다.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내가 본 전창진 감독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인마." 

경기장 안에서의 전창진 감독은 선수들에게 거친 말도 서슴지 않는 독사 같은 사나이다. 선수들의 조그만 실수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으며 심판 판정이 틀렸다 생각하면 지체 없이 항의하는 호랑이 감독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코트 밖에서의 전창진 감독은 다친 선수가 안쓰러워 눈물을 훔치는 지극히 인간적이며 애정이 넘쳐나는 '동네 형' 같은 사람이다. 실제 코트에서 냉혹한 승부사의 모습과는 다르게 평소 선수들과 훈련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찾아볼 수 있다. 농구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키의 열세에도 KT 선수들이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플레이에 임할 수 있도록 사기를 북돋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감독과 선수들 사이의 끈끈한 정과 믿음은 상상 이상이다.

지난 시즌 전 감독이 거친 언행으로 구설수에 오르내릴 때마다 KT 선수들은 적극적으로 나서 그를 옹호하며 의리와 신뢰를 자랑했다. 선수들은 전 감독이 요구하는 것이 화려한 개인기가 아닌 강한 단합력과 팀워크라는 것, 호통은 선수들의 집중력과 정신력을 다시 무장하라고 보내는 신호라는 것을 알기에 감독의 불편한 표정에서 억울함이 아닌 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KT 구단은 스타선수 없는 팀을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강한 조직력과 팀워크를 바탕으로 팀의 최고 전력을 이끌어내는 영리함과 냉철함을 보여준 전 감독의 이러한 능력을 신뢰하기에 다시 한번 KT의 미래를 그에게 맡길 수 있었다. 올해 KT가 전창진 감독에게 거는 기대는 크다. 이젠 승패를 뛰어넘어 관객들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줄 수 있는 '즐거운 농구'를 하는 팀이 되어주길 희망한다. 더불어 단장으로서 한 가지 소망이 더 있다면,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 전창진 감독이 본인의 본 모습을 코트 위에서도 보여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권사일 부산 KT 단장

 

약 력

1963년 5월 20일 서울 출생

서울 상명초등-용산중-용산고-고려대

1986~1987년 삼성전자 선수

1988~1997년 삼성전자 주무

1998~1999년 삼성 썬더스 코치

1999~2000년 원주 TG 삼보 엑써스 코치

2002년 원주 TG 삼보 엑써스 감독

2004년 프로농구 정규리그 감독상

2005년 프로농구 정규리그 감독상

2005~2009년 원주 동부 프로미 감독

2007-2008년 프로농구 정규리그 감독상

2008년 스포츠토토 한국농구대상 감독상

2009년 4월~ 부산 KT 소닉붐 감독

2010년 프로농구 정규리그 감독상

          프로농구 챔피언전 우승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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