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황규백의 '메조틴트(동판화의 한 기법)' 판화는 서정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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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백의 유화 '벽과 정원(Wall and Garden)'(16×34.8㎝, 2010). 신세계갤러리 제공

"나는 정말 엄청난 행운아였고, 모든 게 우연이었어요. 부산에서 태어나서 참담한 한국전쟁을 겪은 뒤에 무작정 프랑스로 향하던 배에서 친절한 일본인을 만난 것도, 프랑스와 미국 뉴욕에서 판화를 완성한 것도, 그리고 지금 서울에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저 나의 행운에 감사할 따름이지." 백발의 팔순 노인이 추억에 잠긴 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이름은 황규백. 1968년 프랑스로 건너가 판화 전문 공방 '아틀리에 17'에서 동판화 작업을 시작했고, 1970년 미국 화상의 초청으로 뉴욕에 가서 동판에 세밀하게 흠집을 내거나 갈아 내어 제작하는 메조틴트(Mezzotint) 판화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모든 게 우연, 난 엄청난 행운아"
프랑스·미국· 영국서 작품 인정
체력 한계로 판화 대신 유화로
붓 들고 인생 마무리 정말 기뻐


황규백은 뉴욕 근교 베어마운틴의 잔디밭에 드러누웠다가 우연히 잔디의 생명력에 반해 잔디 위에 하얀 손수건이 내려앉은 첫 메조틴트 판화 작품을 내놓았다. 그 작품이 영국에서 상을 받자 '이것이 내 길이다' 싶었다. 검정 배경이 주류였던 당시에 회색톤에다 은은하고 수려한 색채를 더하면서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이후 서울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다가 2000년에 접어들면서 체력의 한계로 판화를 접고 귀국한 그는 유화로 판화의 명맥을 이어 가겠노라 천명하고는 작업실을 떠날 줄 몰랐다.

부산 해운대구 신세계백화점 6층 신세계갤러리가 한국 판화계의 원로 황규백을 고향에 초대했다. 9개월간 '마담 투소'에 자리를 내줬던 갤러리는 황규백의 메조틴트 판화 10점과 최근에 그린 유화 등 50여 점을 걸었다.

"뉴욕에서 새로운 것을 해 보려고 2년간 죽을 고생을 하면서 메조틴트를 완성했어요. 그런데 나이 일흔에 30년을 잡았던 도구가 아니라 붓을 들고 나의 작업을 마무리하자 결심했을 때, 모든 게 미지수였어요. 무척 힘이 들었지. 끝도 없이 그리다 '이거다' 싶었을 때 어찌나 기쁘던지. 화랑가의 반응도 좋았어. 허허."

황규백의 메조틴트 판화 '달과 꽃(Moon and Flower)'(32.5×30㎝, 1986). 신세계갤러리 제공

전시장에 선 그의 뒤로 바이올린과 우산, 발레 신발이 있는 메조틴트 판화와 유화가 가득하다. 1986년 작 '달과 꽃(Moon and Flower)'을 보면 화사하고 신비로운 밤, 녹색 풀밭과 나무, 달과 장미 코스모스 양귀비꽃 그리고 새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의 그림을 한참 보고 있노라면, 한 편의 서정시를 막 읽은 듯한 특유의 감성이 어김없이 보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다. 덧없는 시간은 화가의 몸을 늙게 했지만 변함없이 샘솟는 예술가의 마음까지 앗아 가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황규백 전=5월 6일까지 신세계갤러리. 051-745-1503.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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