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팜471 이용희 대표] 흙에서 여유·감성 되찾은 CEO의 '또 다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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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승복을 만들기 위해 마밭이 펼쳐져 있던 데서 상마·하마 마을이 유래했다. 그 양귀비꽃 색깔을 되살린 카페 '더팜471' 앞에서 이용희 대표가 환한 표정으로 보리밭을 둘러보고 있다.

도시인도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꿈꾼다. 전원주택, 귀촌? 좋은 줄 안다. 그러나 직장은 멀고, 학군이 나쁘며, 무엇보다 여윳돈이 없다. 그러다 중년을 지나 노년이 온다. 직장·학교 상관없고, 경제적 여유는 생겼는데 떠날 수가 없다. 도시의 편리를 거부할 만한 기력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어떤가? 고기와 채소가 '식재료'라는 건조한 단어로 뭉뚱그려질 때 그 생명은 인간의 맛을 위한 익명의 엑스트라로 전락한다. 음식이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식탁과 농장이, 인간과 동식물이, 도시와 농촌이 연결된다. 맛도, 아는 만큼 느낀다. 자연 속에 집을 짓고 농장을 가꾸는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났다. 주중에는 기업 경영, 주말에는 땅과 호흡하며 그 생산물로 소비자들과 건강한 먹거리를 나누려는 사람들이다. 단순히 거주 공간만 자연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농작물 생산과 식문화 개선까지 꾀한. 자연에서 새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의 얘기다.

부산 금정산 범어사 아래 하마마을에 있는 '피크닉 카페 더팜471'은 지난해 4월 문 열었다. 이 집 주인은 2007년 경남 양산에서 공업용 플라스틱 제조업체 금양케미칼㈜을 창업한 이용희(50) 대표다.

금양케미칼 운영 성공한 사업가
2년 전 금정산 하마마을로 들어가
주말이면 보리밭 농사·카페 경영

카페 손님 '자연' 가족 '추억' 공유
하마예술제 기간 집 공개 행사도

봄을 맞이하는 금정산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더팜471 테라스에서 이 대표가 책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매실·차나무 가지치기, 그리고 보리

한 달쯤 전 꽃망울만 맺혀 있던 매화는 꽃잎을 거의 떨궜다. 개구리 울음소리 요란하던 웅덩이에선 막 깨어난 올챙이들이 새까맣게 모여 힘차게 꼬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는 더팜471 위에 있는 약 5000㎡ 밭이다. 매실나무와 차나무 수백 그루가 자란다. 이 대표는 "꽃이 피고 나면 새로 나는 가지들을 정리해 줘야 열매에 양분이 잘 전달된다"며 매실나무에 매달려 가지치기에 열심이었다. 거의 야생 수준으로 자라는 차나무는 대형 전지가위로 웃자란 가지를 쳐냈다. 한낮 따가운 햇볕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게 했다. "전에 이 땅을 갖고 계시던 분들이 재배하던 차나무인데 여기서 생산된 녹차는 범어사에만 들어갔다더군요. 맛과 향이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이 대표의 표정은 맑고 밝았다. 그는 내년부터 이 녹차를 카페에서 내놓을 생각이다.

하마마을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더팜471로 가려면 좁은 옛 마을길을 지나 작은 도랑을 건너야 한다. 고당봉에서 발원한 물이 온천천과 수영강, 바다로 흘러가는 길이다. 이 도랑을 건너기 전 계단식으로 2000㎡ 조성된 밭에서는 짙푸른 보리 싹이 10㎝ 안팎으로 자랐다.

"산 아래보다 섭씨 3~4도 낮아 가족들은 겨울 추위에 적응하느라 초반에 고생했는데 보리는 때가 되니 이렇게 끄떡없이 건강한 새싹을 틔워 올렸다"며 이 대표는 뿌듯해했다.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보리 새싹의 강인한 생명력은 칼륨 칼슘 비타민C 등 풍부한 영양분에 응축돼 있다. 이 대표는 이 보리 새싹을 활용한 음료 레시피도 개발하고 있다. 커피와 차, 과일주스, 빵 등을 파는 더팜471 메뉴가 앞으로 더 풍성하고 건강해질 것 같다. 바로 옆에서 키우는 이 다양한 식물들 덕분에 말이다.
만개한 매실나무 가지를 치고 있다.
■일찍 찾은 길 '겸농'

이 대표는 창업 3년 만인 2010년 100만 달러, 이듬해 300만 달러 수출탑을 받았다. 대기업과 협력업체들이 원하는 플라스틱 재료를 맞춤형으로 개발해 공급하는 틈새시장을 잘 파고든 덕에 기업은 급성장했다.

그는 상대적으로 통근하기 편한 부산 금정구 대단지 아파트에 살았다. 대다수 도시인이 갖고 있는 단독주택과 텃밭에 대한 꿈, 그 역시 품고 있었다. '기업은 점점 나아지는데, 내 삶은?' 삭막한 공단과 답답한 고층 아파트를 오가는 생활에 조금씩 회의가 들면서 부산 시내와 근교에서 자연을 가까이 누릴 수 있는 땅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부산 시내인데도 마치 어느 시골 마을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이 하마마을 땅을 보고는 반해 버렸다. 2015년 집을 지어 입주한 뒤 맑은 공기, 계절과 날씨 변화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풍경에 한 번 더 반했다. 계명봉 아래 가을 단풍을 바라보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이렇게 좋으면, 남들도 좋아하지 않을까? 이 멋진 곳을 여러 사람이 공유하게 하자.' '아이들에게 언제까지 딱딱한 경영자 모습만 보여 줄 수는 없지 않나.' 곧바로 집 뒤 능선에 있던 옛 오리고기 식당 터를 사들여 그렇게 더팜471을 지었다. 아내와 사위가 카페 운영을 총괄한다. "카페 손님들이 자연의 혜택을 함께 누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가족이나 일행끼리 보리밭과 매실·녹차밭을 둘러보며 농촌에서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공유할 수 있는 추억거리 하나를 제공한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고 그는 말했다.
카페 실내에 앉아 전원에서의 삶을 설명했다.
주중 공장 일로 바쁜 이 대표는 주말에는 거의 농장을 지킨다. "밭을 가꾸고 나서는 마음이 많이 여유로워졌습니다. 감성도 풍부해진 것 같고요." 지난해 10월의 마지막 밤 처음 열었던 '제1회 하마예술제'는 이 풍부해진 감성의 산물이다. 보리가 익는 오는 5월 20일 두 번째 예술제가, 보리를 거두고 그 자리에 심은 메밀꽃이 피는 10월 세 번째 예술제가 열릴 예정이다.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함께 음악을 듣고 전시를 관람한다. 사전 예약자에 한해 이 대표의 집을 공개하는 행사도 있다. 아파트에 붙잡힌 사람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이벤트다. 이 대표는 신신당부했다. "꿈꾼다면, 생각이 있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실행에 옮기십시오." 자연에 돌아가고 싶어도 노화되는 몸이 따라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사진=김병집 기자 b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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