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을 찾아서] 16. 창녕 석리 성씨 고가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돌처럼 살겠다'더니, 역사의 질곡을 돌처럼 버티었다

성씨 고가 외삼문과 내삼문을 거쳐 들어가면 잘 가꿔진 소나무와 꽝꽝나무들 사이로 숨은 듯한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구연정 영역이다.

경남 창녕군 대지면 석리 마을 어귀에 '창녕 석리 성씨 고가' 주차장이 넓게 펼쳐져 있고 주차장 한쪽에 '양파 시배지'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양파 모양의 대형 조형물 뒤로 짙푸른 볏논을 가로질러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가 뒤로는 대숲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석리 성씨 고가(경남도 문화재자료 제355호)다. '노스페이스' 상표로 잘 알려진 영원무역의 성기학 회장이 실소유주인 집이다. 근·현대 역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한 성씨 고가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사뭇 설렌다.

1850년대 성규호가 터 잡은 집성촌
돌처럼 살겠단 뜻의 '아석'을 당호로

한국전쟁 중 가족 중 일부 월북
김정일 연인 성혜림도 그중 한 명
빨갱이 집안으로 지목돼 큰 고초

전쟁 당시 대부분 소실됐던 가옥
이후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이 복원

한반도 모양을 닮은 연못에 배롱나무꽃이 떨어져 운치를 더한다.
■유일한 문화재는 경근당

관리인이 굳게 닫힌 문을 열어준다. 미리 와 있던 오종식 창녕군 문화관광해설사와 동행해 집 안으로 들어간다. 솟을대문 쪽부터 둘러본다. 이 집은 외삼문 외에 내삼문이 따로 있다. 집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성씨 고가는 한때 37개 동 130칸의 대규모 한옥 고대광실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됐다가 2000년대 들어 성기학 회장이 대부분 복원했다. 성씨 고가는 크게 구연정, 경근당, 아석헌, 석운재 등 4개 영역으로 나뉜다.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행랑채가 여러 채 있고 내삼문을 들어서자 잘 가꿔진 소나무와 꽝꽝나무들 사이로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구연정 영역이다. 안채의 위풍당당한 누마루가 특히 눈에 띈다. 누마루엔 3면에 걸쳐 계자난간을 둘렀고, 누마루 앞엔 S자 형태의 연못이 조성돼 있다. 이곳 터가 지네의 입에 해당하는 자리여서 지네가 좋아하는 지렁이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누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연못은 영락없는 한반도 모양이다. 그래서 '반도지'로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때 집 주인 성재경이 고가 앞에 '지양강습소'를 세워 교육에 힘쓴 만큼 독립정신이 투영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연못 위에 붉은 목백일홍 꽃잎이 떨어져 계절 감각을 일깨워 준다.
집 안에 있던 돌을 쌓아 만든 탑.
안채 바로 앞 큰 바위에 '석문동(石門洞)'이란 글귀가 음각돼 있다. 석동 또는 석리라는 지명의 유래를 짐작게 한다. 외부와 통하는 대문 쪽 입구와 마당에는 몇 개의 돌확이 눈에 띈다. 남자용 돌확은 동글고 여자용 돌확은 복숭아 모양으로 패여 있다. 이는 눈과 귀와 입을 씻어 마음의 청정함을 유지하라는 의미와 청결한 신체 관리를 위한 실용성의 의미를 겸비하고 있다고 한다.

집 안 뒤쪽에 길게 늘어선 대나무 숲으로 가 본다. 대나무 숲속에 들어서자 한낮의 무더위 속에서도 서늘한 한기가 목덜미를 스친다.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며 숨겨진 고가의 뒷모습을 완상한다. 대나무 중엔 검은색의 오죽(烏竹)이 제법 섞여 있어 운치를 더한다. 
이 집의 유일한 문화재 공간인 경근당 현판.
대나무 숲길이 끝날 즈음에 경근당(敬勤堂)이 나온다. 성기상 푸드웰 회장과 성기학 영원무역 회장 형제의 생가이자, 이 집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정면 6칸의 안채는 시멘트를 사용했고 대청마루 등에 유리 창문을 달아 근대에서 현대로의 시대 변천상을 반영하고 있다.

경건당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석운재(石雲齋)가 자리하고 있으며 석운재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아석헌(我石軒)이 위치한다. 아석헌과 석운재 경계 담 밑에 곧고 굵은 오동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이 집의 내력을 말해주는 듯하다. 성기학 회장은 2000년대 초반 성씨 고가를 수리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해체되기 직전의 고택들을 사들여 그 부재들로 최대한 옛 모습을 복원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따라서 이 집은 지어진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양식이 가미돼 한옥 변천사를 잘 보여준다.
외삼문과 그 안으로 내삼문이 연이어 있다.
■양파를 처음 재배한 집안

석리는 창녕 성씨 집성촌이다. 1850년대 아석헌 성규호가 유원면 회룡에서 이곳으로 터전을 옮긴 이후 150여 년째 일가들이 세거해 오고 있는 곳이다.

성규호는 ㄷ자의 안채와 한일(一)자의 사랑채를 짓고 '나 또한 돌처럼 살리라'라는 뜻의 아호 아석을 당호로 삼았다.

성규호의 장남 성찬영 슬하엔 낙문, 낙교, 낙안, 삼 형제가 있었다. 둘째 낙교에게 손이 없자 낙문의 둘째 아들 유경을 양자를 보내 대를 잇게 했다. 장손 낙문은 가산을 크게 일으켜 가택을 중심으로 반경 6㎞의 드넓은 전답을 경영했다. 가문의 법도는 엄격했다. 적선을 가훈으로, 근검과 청렴을 가풍으로 삼았다. 석민 성낙안과 사촌 성낙성은 사회사업에 치중했다. 1920년 고가 앞 신작로 건너편에 신식학교(지양강습소)를 지어 교육에 열중했다.

낙안의 아들 우석 성재경(성기상·기학 회장의 아버지)은 선친의 뜻에 따라 광복 후 경근당 앞에 지포중학교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성재경의 할아버지 성찬영은 1909년 전국에서 처음 양파 재배에 성공했고, 손자 성재경은 채종에 성공해 대량 보급의 길을 열었다. 성재경은 인근 경작지에 보리 대신 환금성이 높은 양파를 재배토록 해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이후 창녕은 양파 시배지로 명성을 얻었다. 마을 어귀 '양파 시배지' 표석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주차장에 세워진 '양파 시배지' 조형물.
■성혜림의 비극적인 드라마

민족주의자였던 우석 성재경은 '적선지가(積善之家)'로 성씨 집안의 기반을 다진 분이다. 그러나 적선지가 전통에도 이 집안의 일부 가족이 좌익 활동을 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빨갱이 집안'으로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성재경의 사촌 성유경(성낙교의 양자)은 좌익 성향의 인텔리였다. 남로당원이었던 그는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 두 딸 혜랑과 혜림 등 가족들을 데리고 월북했다. '김정일의 여자'로 비운의 삶을 살다 간 성혜림이 바로 이 사람이다.

성혜림 일대기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성혜림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방학 때면 할아버지 집인 성씨 고가를 찾아 마을 또래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성혜림은 평양예술학교 졸업 후 월북 작가 리기영의 장남 리평과 결혼해 딸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뤘다. 뛰어난 미모와 발군의 연기로 북한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로도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김정일의 눈에 띄었던 건 비극적인 결말의 시작이었다. 김정일은 리평과 결혼 생활을 중지시키고 1967년 성혜림과 동거에 들어간다. 두 사람 사이에 김정남이 태어났다. 김정남은 지난해 말레이시아에서 살해됐다.

이들의 동거는 당시 김일성 주석의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여서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이때부터 성혜림은 배우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고 폐쇄된 생활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결국 성혜림은 언니 혜랑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나야 했다. 혜림 곁을 지키던 혜랑과 그의 아들 이한영은 망명했고 지병인 신경쇠약과 심장병으로 오랜 투병 끝에 성혜림은 2002년 5월 숨졌다. 아들 김정남의 피살에 이어 손자 김한솔 역시 불안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성유경의 월북으로 성씨 집안은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 후유증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고가 취재를 하며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전 취재 허가나 관리인들의 엄격한 관람 통제 등 폐쇄적인 고가 운영에서 이러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성씨 집안이 적선지가로서 당당한 면모를 회복하고 고가가 활짝 개방될 날을 기대한다.

글·사진=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