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를 끊자] 3. 난민 향한 싸늘한 시선

곽진석 기자 kwak@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일자리 뺏고 세금 낭비’ 난민 지위 받아도 편견의 벽 여전

지난 2014년 난민 지위를 취득한 파키스탄 출신 칼리드 발로츠 무하마드 자이 씨와 가족들이 부산 사상구 괘법동 집에서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얘기하고 있다. 강원태 기자 wkang@ 지난 2014년 난민 지위를 취득한 파키스탄 출신 칼리드 발로츠 무하마드 자이 씨와 가족들이 부산 사상구 괘법동 집에서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얘기하고 있다. 강원태 기자 wkang@

지난해 아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남단예멘 공화국 출신의 난민들이 제주도에 대거 입국하면서 난민 문제가 대한민국의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한국은 2013년에 아시아 최초로 국제법과 독립된 ‘난민인정 절차와 처우에 관한 법률(난민법)’을 시행해 인도적 선진국 반열에 올랐지만, 일자리와 안전 등의 문제로 난민 유입과 난민법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크다. 대한민국 국민과 같은 수준의 사회보장을 받는 ‘난민 지위’를 얻고도 배타적인 시선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도 있다. 혐오라는 파도 속에서 표류 중인 대한민국 난민 892명 중 한 가족을 만났다.

점령 발루치스탄 출신 칼리드 씨

고향서 독립운동 중 고문 당해

이주노동 경험 있는 한국 입국

신청 5년째 2014년 지위 획득

2013년 아시아 첫 난민법 시행

현재 국내 892명 난민 거주

제주 예멘 난민 사태 반발 촉발

전문가들 “난민 처지 이해 필요”

■발루치 독립운동가에서 한국 난민으로

칼리드 발로츠 무하마드 자이(51) 씨는 외교부 지정 여행금지구역인 파키스탄 남서부의 발루치스탄주 카라치에서 태어났다.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과 접해 있는 발루치스탄은 자원과 광물이 풍부한 약소국이었던 탓에, 1948년 3월 파키스탄에 강제 점령 당했다. 1968년 이곳에서 발루치 민족으로 태어난 칼리드 씨는 파키스탄의 4차례에 걸친 대(對) 발루치 군사작전(1948~1977년)을 겪으며 이웃들이 눈앞에서 처참히 죽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들은 우리 민족을 지우려 합니다. 저는 ‘평화’란 단어의 뜻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는 33살이던 2001년, 신문을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광고를 보고 무작정 ‘지옥’을 떠나 대한민국 김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울 가구 공장과 도금 공장을 전전하며 3년간 일한 그는 비자 만료로 2005년 귀국해 아내 나디아(36) 씨와 결혼했다. 이후 발루치스탄 무역회사의 회계사로 취직한 그는 독립단체 격인 ‘발루치민족운동(Baloch National Movement)’에 가입해 한국에서 번 돈을 발루치스탄 독립운동에 쏟아부으며 탄압 반대 시위 등 민족 활동을 이어나갔다.

2006년 7월, 칼리드 씨의 사무실에 들이닥친 파키스탄 정부군은 독립운동가인 그를 향해 세 발의 총탄을 쐈다. 파키스탄 정부군은 총상을 입고 쓰러진 그를 관공서 건물 지하로 끌고 갔다. 파키스탄에 대항해 ‘민족 운동’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칼리드 씨는 독한 향정신성 주사가 투여된 채 정신을 잃을 때까지 고문을 받았다. 당시 만삭의 아내는 하루아침에 사라진 남편을 찾아 흙길을 전전하다가 예정일보다 이른 출산을 했다.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영양실조를 안은 채 태어난 아들 미르(13) 군은 출생 3일 만에 뇌 병변 1급 장애인이 됐다.

칼리드 씨는 무사히 돌아왔지만, 그들에게 미래는 없었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부군은 계속 저를 찾았고, 저는 ‘평화의 땅’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2009년 자이 씨는 아내와 자녀들을 사촌에게 맡기고 돈이 아닌, ‘미래’를 찾아 나섰다. 그곳은 2001년 방문했을 때 ‘따뜻한 마음씨’가 인상 깊었던 한국이었다.

■난민으로 인정 받은 뒤에도 느끼는 벽

그는 2009년 첫 난민 신청에서 ‘불허’ 통보를 받았다. 2년 후인 2011년부터 이의신청과 행정소송을 거쳐 2014년 마침내 난민 지위를 취득했다. 이후 그는 아내와 큰아들 미르 군, 큰딸 발로츠(11) 양을 한국으로 불러와 부산에 정착했다.

칼리드 씨는 ‘난민 지위’를 받으면 한국에서 ‘평화’를 맞이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난민 반대 시위를 하는 탓에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이들 가족은 외출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난민 지위를 얻은 후 아동 수당을 포함해 이들 가족에게 지원되는 정부 지원금은 월 210만 원가량. 칼리드 씨는 난민으로서 받고 있는 지원금 때문에 일부 사람이 자신들에게 배타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취업난이 닥치고 경제가 힘들어지는 와중에 난민들이 들어와 일자리를 뺏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칼리드 씨는 자신을 ‘세금 도둑’이라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지난 주 마트에 갔을 때 “우리 세금을 돌려내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어 도망쳐 나오기도 했다. 현재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는 칼리드 씨는 몸이 나으면 부산 사상구 공장에서 일할 계획이다. 칼리드 씨는 통일과 독립운동, 악감정도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믿는다. “코앞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본 절실함이 있는 난민에게 한국은 ‘평화의 땅’이지만, 일자리나 다른 무언가를 원해 한국에 온다면 ‘바다 위에 떠 있는 무인도’에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칼리드 씨의 집 안방에는 파키스탄 국기가 아닌, 때묻지 않은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난민 혐오를 넘어

지난해 6월부터 진행된 청와대 청원페이지의 ‘난민 유입 반대’ 청원에 한 달 만에 70만 429명의 국민이 찬성의 뜻을 밝혔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는 지난해 8월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10명을 대상으로 제주도의 예멘 난민과 관련해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난민에 대해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표한 사람은 87.1%(880명)로 긍정적인 입장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를 보였다.

전문가들은 혐오 현상을 난민에 대한 이해 부족이 불러온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난민이 지위 획득을 위한 심사를 받을 때 면접, 국가 정황 조사, 등 철저한 절차를 밟는다. 일반 외국인 여행객보다 더 안전한 셈이다. 게다가 난민 심사 절차만 최소 2년이 걸리며 신청자 수 대비 인정자는 2~3%에 그치는 것이 현실이다.

부산 이주민과함께 정귀순 대표는 “우리 많은 선조들도 난민이었던 때가 있다”며 “‘무조건 난민 반대’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그들의 처우와 상황을 들으려고 노력하고 보듬어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곽진석 기자 kwak@busan.com


곽진석 기자 kwak@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