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791. 제 나라 글자 두고

이진원 기자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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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이진원 교열부장 이진원 교열부장

1년 전 문재인 대통령은 각 비서관실에 ‘春風秋霜(춘풍추상)’이라는 액자를 선물했다. <채근담>에서 가져온 글귀로, 남에게는 봄바람과 같이 부드럽게 대하고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는 뜻. 초심을 잃지 말자는 의미에서 한 선물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정치인이 한자 성어를 휘호해서 목표나 심중을 드러내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富國强兵 永世自由(부국강병 영세자유)’를 남겼고, 박정희 대통령은 ‘革命完收(혁명완수) 勤勉儉素(근면검소) 有備無患(유비무환) 國力培養(국력배양) 國論統一(국론통일)’ 따위 글귀를 해가 바뀔 때마다 썼다. 김영삼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 시절에 좌우명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즐겨 썼고, IMF 구제금융 사태 속에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을 내세웠다.

하나, 좋은 것도 이 정도까지다. 한자는 중국인도 진저리 칠 만큼 어려워서, 새로운 문자(간체자)를 만들 정도로 다루기가 녹록잖기 때문이다.(우리가 배우는 한자로는 중국에 가서 필담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간체자는 다른 문자다.) 2011년 홍준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당사 집무실에 ‘倜儻不羈’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기개가 있고 뜻이 커서 남에게 눌려 지내지 않는다는 뜻. 한데, 얽매이지 않는다는 ‘당’ 자가 사람인변 대신 심방변이어서, 결국 액자를 내렸다고 한다. 黨에 심방변을 쓰면 ‘깜짝 놀라거나 실심한 모양’을 뜻하는 ‘창’ 자가 된다. ‘척당불기’가 아니라 ‘척창불기’였던 것.

뭐 어쨌거나, 나라 안에서 우리끼리 이러는 거야 괜찮다. 2015년 반기문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54세 생일을 맞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上善若水’라는 글귀를 선물했다. 글귀 왼쪽엔 ‘潘基文’, 오른쪽엔 ‘奧巴馬’라고 써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이 중국 문자를 홍보하는 꼴이었던 것. ‘물 흐르듯이/반기문/오바마’라고 썼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지난주에 미국에 간 문희상 국회의장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萬折必東’이라 쓴 족자를 선물했다. 한데, 저 족자에도 ‘DEAR PELOSI’와 ‘己亥春 山民 文喜相’만 있을 뿐, 역시 한글은 한 자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뜻마저 적절치 않았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을 보자.

*만절필동(萬折必東): 황허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

웬 충신? 웬 절개? 문 의장이 평소 나라 안에서 즐겨 쓰던 글귀겠지만, 대한민국 국회의장이 미국 하원의장에게 하는 선물로는 적절치 않았다는 얘기다.(아! 이 글엔 잘못 쓰인 한자가 하나 있다. 한자 주창자라면, 재미 삼아 찾아보시라.) jinwoni@busan.com


이진원 기자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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