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미래로 100년] ⑦ 거제 4·3 만세운동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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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등산에서 시작된 항일 정신, 100년 후 노동 운동의 뿌리가 되다


4·3 아주장터 독립만세운동 재연 행사를 주관해 온 허상구 아주동번영회장이 만세 시위의 시발점이 된 당등산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윤택근이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한 곳이 지금의 ‘민주광장’이다. 거제 항일 운동의 진원지가 이제 노동 운동의 성지로 바뀐 셈이다. 4·3 아주장터 독립만세운동 재연 행사를 주관해 온 허상구 아주동번영회장이 만세 시위의 시발점이 된 당등산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윤택근이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한 곳이 지금의 ‘민주광장’이다. 거제 항일 운동의 진원지가 이제 노동 운동의 성지로 바뀐 셈이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조선 전역에는 일제에 저항하는 민중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경남 끝자락에 자리 잡은 섬 거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답게 민중저항사에서도 눈부신 족적을 남겨 온 곳이 거제다. 100년 전 거제에선 하늘마저 감동시킨 ‘4·3 만세운동’이 있었다.

아주장터 시위 이끈 윤택근

“대한 독립 만세” 선창한 그곳

현재 옥포조선소 민주광장 조성

대규모 집회·투쟁 결의 성지로

4월 6일 옥포에선 주종찬 중심

“독립 만세” 제창 10리 길 행진도

두 번의 시위, 거제 해방운동 촉발

“노동자·농민들이 주도한 운동”

항일 운동 발원지, 노동 운동 성지로

지난 20일 대우조선해양 경남 거제 옥포조선소. 정오를 지나자 회색 점퍼를 걸친 노동자들이 하나둘 모였다. 30여 분 만에 ‘단결! 투쟁!’ ‘생존권 사수’ 등이 적힌 깃발을 들거나 머리띠를 두른 3000여 명이 모여 연신 구호를 외쳤다. 이들은 대우조선해양 매각에 반대하는 파업 결의를 다지려고 이곳에 운집했다. 노동자들은 거제 경제의 버팀목 격인 대우조선 매각 반대를 주장하며 파업에 나서기로 했다.

100년 전 이맘때도 그랬다. 기미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진 지 한 달여. 자주독립을 갈망하는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 마침내 거제도에 닿았다.

그해 4월 2일 밤. 농민 윤택근(일명 윤일, 당시 28세)의 주도로 이운면 하아리(아양리) 장터(아주장터) 인근 한 가정집에 모인 20대 청년들은 민족해방운동을 결의한다. 거사 일은 바로 다음 날로 마침 장이 섰다.

4·3 아주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윤택근 독립운동가. 4·3 아주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윤택근 독립운동가.

밤사이 ‘3일 당등산에서 대한독립을 위한 모임을 갖는다’는 격문(전단)이 돌았고, 새벽녘 애국지사들이 속속 당등산으로 집결했다. 정오께 200여 명이 모였고 윤택근이 선두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의 선창으로 시작된 만세 외침은 이내 거대한 함성이 돼 퍼져 나갔다. 시위대가 아주장터로 내려오자 수많은 군중이 합세했다. 어림잡아 3000여 명.

뒤늦게 시위 소식을 들은 일본 군경이 달려왔고, 군중을 향한 발포 명령이 떨어지려는 순간, 난데없이 소낙비가 쏟아졌다. 비에 젖은 화약총이 격발되지 않아 당황한 틈을 타 시위대는 흩어졌다. 김의부 거제향토연구소장은 “나라 잃은 민족의 한을 하늘도 아는 듯했다. 시위 규모를 감안할 때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했다.

이후 일본 헌병은 아주, 아양, 옥포 일대를 이 잡듯 뒤지며 주동자 색출에 나섰다. 하루 만에 윤택근과 이주근, 이인수 등이 모두 붙잡혔다.

4·3 만세 시위의 시발점이 된 당등산. 그 자리엔 지금 옥포조선소가 섰다. 특히 윤택근이 올라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한 곳에는 ‘민주광장’이 조성됐다. 민주광장은 조선소 물자와 인력이 집중되는 대동맥이다. 여기가 막히면 조선소 가동이 중단될 정도다. 이 때문에 대우조선 노동자의 투쟁 장소로 활용된다. 대규모 노조 집회나 투쟁 결의, 선전전이 이곳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20일 총파업 결의대회가 열린 바로 그곳이다. 100년 전 항일 운동의 발원지가 노동 운동의 성지로 이어진 것이다.

꺼지지 않는 저항정신, 해방운동 촉발

아주장터 시위 이후 일제의 감시는 엄중해졌다. 그러나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불과 3일 뒤, 이번엔 옥포에서 봉기했다. 아주장터 시위에 참가했던 주종찬(당시 31세)이 중심에 섰다. 예수교 신자였던 주종찬은 신도와 주민을 이끌고 옥포 망덕봉에 올라 ‘대한 독립 만세’를 제창하며 아주장터까지 10리 길을 행진했다.

장터를 돌아 이운면사무소에 도착한 시위대는 아예 면사무소를 점거하곤 “침략자 일본은 물러가라! 친일파 매국노들은 각성하라!”며 울분을 토했다.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목 놓아 부르다 저녁 무렵 자진 해산했다. 일본 헌병은 다음 날 마을 수색을 벌여 주종찬 등 10여 명을 잡아갔다.

결국 법정에 선 윤택근과 주종찬, 끝까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자주독립을 주장했다. 일본 헌병의 모진 고문에도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며 버텼다. 특히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던 주종찬은 ‘또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느냐’는 판사의 심문에,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깨물어 ‘일심(一心)’이라 써 굳은 신념을 드러냈다.

4·3, 4·6 두 번의 만세 시위는 거제의 민족해방운동을 촉발시켰다. 지역 독립운동의 정신적·사상적 토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아주독립만세운동 기념식을 주관해 온 허상구 아주동번영회장은 “거제의 3·1 운동은 노동자와 농민 같은 민초들이 주도했다. 작은 힘을 모아 거대한 집권 세력에 저항한다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가 맞닿는 점이 있다”며

“이런 정신이 지금 거제 경제를 이끄는 원동력을 만들어 냈음이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뒤엉킨 역사, 묻혀 버린 투사

그럼에도 거제지역 3·1 운동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4·3 아주장터 만세 운동 재연도 92년 만인 2011년에 처음 열렸다. 이마저 ‘4·3’이 아닌 ‘5·2’ 만세운동으로 시작했다. 당시 주동자 판결문에 명시된 사건 일자 ‘4월 3일’을 음력으로 착각, 이를 양력으로 바꿔 5월 2일로 본 것이다. 심지어 기념일도 5월 2일로 지정했다.

향토사학계를 중심으로 반론이 제기됐다. 일제강점기 판결문은 사건 일자를 기술할 때 주로 양력을 사용했지만 음력을 사용하는 경우 날짜 앞에 ‘음(陰)’ 또는 ‘구(舊)’란 글자를 기입하는데, 이런 표시가 없다는 것이었다. 거제시는 2016년 보훈처 질의를 거쳐 양력 4월 3일로 바로잡았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갑생 연구원은 “각종 재판 기록에 따르면 수많은 군중 중 이름이 명확히 나오는 인물만 100명이 넘는데 그중 제대로 평가받은 독립투사는 손에 꼽을 정도”라며 “조국 독립에 헌신하고도 이념 논쟁 등으로 배제된 인물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사진=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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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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