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립극단 제64회 정기공연 침묵극 ‘물의 정거장’

이준영 선임기자 gapi@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말 없이 말하다

‘물의 정거장’ 리허설 장면. 정처 없이 떠도는 두 남자가 수돗가에서 물을 입에 적시고 있다. 부산시립극단 제공 ‘물의 정거장’ 리허설 장면. 정처 없이 떠도는 두 남자가 수돗가에서 물을 입에 적시고 있다. 부산시립극단 제공

배우들의 동작이 느릿느릿하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내내 대사 한 마디 없다. 하지만 한바탕 소란을 겪는 것처럼 머리가 복잡하고 귀가 먹먹해져 온다. 마주하는 현상을 언어라는 개념으로만 이해해왔던 사고가 산산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헤아릴 수 없는 의미를 내보이는 배우의 표정과 몸짓에 몰입하는 지점에 도달하면서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간다.

부산시립극단은 오는 8일부터 13일까지 제64회 정기공연으로 침묵극(沈默劇) ‘물의 정거장(水の驛), 연출 김세일’을 부산시민회관(부산 동구 범일동) 소극장 무대에 올린다. 일본의 거장 오타 쇼고의 원작인 이 작품은 실험성 짙은 연극으로 1981년 초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인기를 끌어왔다. ‘물의 정거장’은 1988년 부산시민회관 소극장에서 공연한 적이 있어 30년 만에 같은 무대에서 부산 관객을 찾게 됐다.

8~13일 부산시민회관 소극장

거장 오타 쇼고 원작 실험 연극

무대는 생활 폐기물이 산을 이루는 어느 도시의 빌딩 숲속 좁은 마당. 방울이 보일 정도로 물이 떨어지는 수도꼭지가 보인다. 사방이 적요(寂寥)하고, 떨어지는 물이 고인 물에 부딪히는 소리에 관객의 눈길은 수돗가로 향한다. 그때 슬로비디오를 연상할 만큼 동작이 더딘 배우가 등장한다. 표정은 없고, 수돗물을 응시하는 눈만 연기하는 듯하다. 에릭 사티(Erik Satie)가 작곡한 ‘짐노페디(Gymnopedie)’가 연극 전반을 아우르고 있다.

방랑자인 두 남자가 물가에 한참이나 머무른다. 자신을 달래고, 상대방을 격려하면서 힘을 얻고 어디론가 떠난다. 한없이 지친 중년 여성이 축 처진 어깨를 겨우 감당하며 발을 끌듯이 나타난다. 그녀는 물가에서 탈진했는지, 아니면 안도를 얻었는지 풀썩 쓰러지고 만다.

임신한 부부가 유모차를 밀면서 수돗가로 다가오지만, 알고 보니 ‘상상 임신’이다. 부부는 그곳에서 성행위를 연상하게 하는 행위를 한다. 새 생명 탄생과 물의 상관관계가 떠오른다. 10명이 넘는 배우들이 물가로 나와 각자 의미 있는 연기를 보인다. 그들의 소리 없는 비명에 귀를 막는 관객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온몸에 온갖 건설장비를 걸친 노동자가 힘에 겨운 듯 수돗가로 다가온다. 가수 정수라의 노래 ‘아! 대한민국’이 힘차게 흘러나온다. ‘원하는 것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가 있어…’라는 가사 속에 노동자는 어렵사리 목을 축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번 공연에서 부산시립극단 배우 11명과 일본 배우 6명이 호흡을 이뤘다. 연출을 맡은 김세일 감독은 경성대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하고, 2002년 일본 문화청 해외예술가 초청 연수를 위해 도일(渡日)했다. 김 감독은 이후 ‘극단 世 aml ’ 대표로 일본 전역에서 활동 중이다. ‘물의 정거장’ 일본인 출연진도 김 감독이 이끄는 극단의 간판격인 배우들이다.

김 감독은 “수돗가를 스쳐 가는 사람들의 불안, 고통, 고독의 울부짖음을 오감을 통해 직관으로 느끼는 연극”이라며 “침묵보다 강한 언어가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물의 정거장(水の驛)=4월 8일부터 13일까지 평일 오후 7시 30분, 주말 오후 5시 부산시민회관 소극장. 관람료1만 원, 051-607-3125. 이준영 선임기자 gapi@busan.com


이준영 선임기자 gapi@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