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터치] 빼앗긴, 도시의 ‘젊은’ 놀이터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김건우 대안문화행동 재미난복수 대표

1980년대 주로 황령산 아래 산동네 언저리 골목에서 구슬이나 딱지를 가지고 놀았다. 다망구나 고무치기처럼 제법 규모 있는 놀이를 위해 아이들은 공터에 모이곤 했다. 위급한 상황에 소방차가 드나들 수 있게 만든 널찍한 소방도로였다. 그 공터는 소방차보다 아이들이 모이고 노는 놀이터로 이용됐다. 부산진구 전포동에서 황령터널 초입으로 들어가는 큰길 근처였다.

자생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놀이 공간

도시화 진행되면서 차량에 점령당해

빨리 지나가는 통로로 전락한 거리보다

머물고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야

1990년대엔 백양산 자락에서 주로 놀았다. 계곡에 설치된 파이프를 따라 올라가며 각종 장애물을 제거하는 탐험 놀이를 했다. 쑥을 캐거나 가재, 개구리, 도롱뇽을 열심히 잡았다. 계곡 초입에는 입구가 둘인 쌍동굴이 있었는데 단 한 명도 그 동굴 끝까지 가보지 못했다. 아이들에겐 두려움과 경외의 장소였던 그곳이 어느 날 백양터널 공사로 한순간에 폭파되는 걸 봤다. 동굴은 생각보다 짧았다. 이를 비웃듯 훨씬 긴 터널이 생기고, 도롱뇽이 살던 곳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197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난 부산 인구는 1995년 389만여 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산업화 과정에서 진행된 도시화는 더 빠른 이동이 우선됐다. 경제적 효용의 극대화를 내세워 수직 주거 형태가 일반화됐다. 집약된 토지에 밀집한 인구의 이동과 물류의 빠른 수송을 위해 골목보다 큰길이 필요했고 부산엔 사방팔방으로 도로가 났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모여서 놀 수 있는 공터를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도로에서 차를 막거나 하천가에서 ‘재미난복수’라는 거리축제를 벌이며 놀기 시작했다. 물론 어릴 적 즐겼던 놀이의 형태와 마시는 음료는 달라졌지만 말이다. 주요 거점은 금정산 자락 부산대 정문 앞과 온천천이었다. 두 공간은 각각 한국에서 독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2012년 학내에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기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대학교 정문 진입 도로를 막고 축제가 벌어질 수 있는 거리였다. 온천천은 2010년 온천천 개발 계획으로 지워지기 전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그라피티 존이 형성됐던 곳이었다.

첫 번째 거점인 ‘부대 정문’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 집회장으로 사용됐던 거리였다. 대학생과 시민이 처음으로 만나는 광장이기도 했다. 2000년대부터는 다양한 문화제와 축제가 열리며 지역을 바탕으로 한 청년·인디·언더·저항문화 등 ‘서브컬처 신(subculture scene)’의 다양성을 만들어가는 거점 거리로 사용됐다. 2012년 이후 학내에 들어선 백화점 방문 고객의 차량 이동에 방해가 된다는 민원으로 거리의 주인이 차량에게 넘어갔다.

두 번째 거점인 온천천은 장전, 부산대, 온천장 지하철역으로 이어진 하천의 양쪽 옹벽을 따라 그라피티가 펼쳐졌던 곳이다. 구글어스에 ‘Graffiti wall PNU’라는 설명이 사진과 함께 등록돼 있었을 만큼 세계적으로 독특한 거리의 색깔을 만들었다. 그 덕에 수많은 영화와 뮤직비디오, 화보의 단골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2010년 부산시는 그라피티가 저항성과 폭력성이 강하고 예술적 가치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모두 지운다고 했다. 그렇게 지워졌다.

두 공간의 공통점은 차가 다니지 않는 환경을 만들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주변 지역의 문화적 토양과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형태의 문화 공간과 색깔이 있는 거리를 만들어 냈다. 걷고 싶고, 머물며 놀고 싶은 예술의 거리가 자생성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공공의 장소에 정부 예산을 대규모로 투입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예술가들이 주도해 만들어진 두 공간은 ‘차가 없는’ ‘걸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서 가능했다.

아이를 키우는 터라 부쩍 어릴 적 놀이터 생각이 많이 난다. 지금은 골목에서, 공터에서, 야산에서 뛰놀 수 있는 아이들의 공간은 찾기 어렵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 지나는 차량에 온 신경을 집중해 아이를 돌봐야 한다. 길을 걷는 즐거움도, 골목을 지나 마주치는 사람들의 반가움도 없이 도시의 거리는 그저 빨리 지나가 버려야 하는 통로가 된 것이 못내 아쉽다. 시민이 안전하게 머물고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는 만큼 시민이 행복할 수 있는 장소도 늘어나는 것 아닐까. 부산의 청년들은 지금 맘껏 상상력을 쏟아낼 수 있는 젊은 자유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