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조국 사태’ 환멸은 오래도록 남는다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전창훈 서울정치팀 차장

대형사고가 나기 전 전조 현상이 반드시 있다는 ‘하인리히 법칙’은 정치에도 유효하다. 실패로 마감한 정권의 역사에도 작은 실책들과 ‘변곡점’이라 할 만한 사건들은 늘 있어 왔다. 탄핵으로 단명한 박근혜 정부의 ‘망조’는 2015년 ‘유승민 찍어내기’부터 시작됐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증세 없는 복지’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박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의 정치”로 낙인찍힌 당시 유 원내대표는 친박근혜계의 조리돌림 끝에 결국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박 대통령의 카리스마는 폭발했지만, 당내 숨죽인 많은 이들은 ‘이게 당이냐’며 절망했다. 기세가 오른 친박들은 이듬해 총선 공천에서 이른바 ‘감별사’까지 동원하는 무리수를 뒀다. 몇 달 뒤 60여명의 한국당 의원들이 탄핵에 동조한 것은 이런 전조들이 쌓인 결과물이었다.

지난 한 달 간 온 나라를 흔든 ‘조국 정국’도 임기 중반을 지나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 운영에 큰 변곡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성공보다는 실패의 전조라는 예감이 짙다. 유승민 죽이기도, 조국 살리기도 형태는 다르지만, 정권의 오만이 중도층의 환멸을 부추겼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촛불 정신’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는 금과옥조처럼 내세웠던 원칙들을 스스로 훼손했다. 틈만 나면 ‘국민의 눈높이’를 강조하던 청와대와 여당은 국민 다수의 일관된 ‘부적격’ 의견을 묵살했다. ‘집단지성’을 발휘한 그 현명했던 국민들은 ‘가짜 뉴스’에 휘둘리는 군중으로 격하됐다.

국가를 경영하는 정치세력으로서 일관성도, 그 일관성을 깨는 데 대한 염치도 없었다. 정점은 검찰에 대한 태도다. 적폐청산의 상징으로, 검찰 개혁의 적임으로 극찬했던 윤석열 검찰총장을 임명장 잉크도 마르기 전에 ‘적폐 검찰’의 수뇌로 몰아붙였다. 검찰 수사에 석연치 않은 점이 분명 있지만, 스스로 만든 이 상황에 대한 일말의 자성도 없이 시퍼런 적의만 가득한 그 표변에 아연할 정도다.

그 뿐인가. 내부 비판을 한 동료 의원은 ‘배신자’로, 촛불을 든 대학생들은 ‘야당의 조종을 받는 철부지’로, 비판 보도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광기’로 폄훼됐다. 권력을 쥔 정치 세력이 상처 입은 고슴도치마냥 잔뜩 웅그린 채 사방으로 가시를 세웠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모든 상식적인 비판들을 진영 간 대결 논리로 치환해 국론을 두 쪽으로 갈라치는 데 집권 세력이 앞장섰다는 점이다. 검찰 수사를 받는 법무부 장관 임명을 왜 강행해야 하는지, 이렇게 상처 많은 법무부 장관이 어떻게 사법개혁의 적임이 될 수 있는지, 조국의 진퇴에 왜 정권의 명운이 달린 것인지 도통 이해하기 힘든 의문점들에 대한 답은 없고, 오직 ‘이 싸움에서 지면 끝, 닥치고 공격!’이라는 대결 논리만 주문처럼 되뇌었다.

9일 결국 문 대통령의 임명 강행으로 일단락된 조국 사태는 당장의 혼란뿐만 아니라 인사청문 정국 등에서 수시로 소환돼 여야의 극한 대결을 부추기는 소재로 재활용될 것이며, 그 때마다 합의에 의한 해결이 불가능한 한국 정치에 대한 국민의 절망감은 깊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여권은 총선까진 아직 시간이 길고, 이 국면은 곧 잊혀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분위기다. 과연 그럴까? 실망은 상황에 따라 희망으로 바뀔 수 있지만, 환멸은 심중에 오래도록 남는다. 4년 전 그 때처럼. jch@


전창훈 기자 jch@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