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으로 세상 읽기] 28.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의 전환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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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 구분 못 하면 삶과 사회 모두가 위험

<마담 보바리>는 1850년대 이혼을 허용하지 않아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던 불륜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사진은 영화 ‘마담 보바리’의 한 장면. 부산일보 DB <마담 보바리>는 1850년대 이혼을 허용하지 않아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던 불륜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사진은 영화 ‘마담 보바리’의 한 장면. 부산일보 DB

환상에서 깨어날 때가 가장 괴롭다. 사랑한 연인이 속물 덩어리이고 존경한 스승이 위선투성이로 드러나는 경우 대체로 환멸을 느끼게 된다. 몇 년 사이 이른바 ‘사회지도층’을 둘러싼 베일이 걷히면서 환멸감은 극에 달하고 있다. 거꾸로 믿었던 인사가 그럴 리 없다는 반발심에서 사실과 다른 ‘가짜뉴스’에 의존하고 ‘음모론’에 중독되기도 한다. 선진국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미국이야말로 사실이나 실제가 별반 중요하지 않다는 탈(脫)진실(post-truth) 사회의 진원지다. ‘진리는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믿게 만드는 환상’이라는 식의 상대주의적 사고가 확산하면서 사실과 허구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가상의 현실화가 조장되고 있다.

당대 간통 풍속 묘사로 필화 겪어

가짜와 진짜 착각하면 삶은 파괴

환상 통해 현실 보면 불만투성이

대혁명 약속 공염불된 현실 비판

그러나 꿈은 현실을 이기지 못한다. 미래를 기대하거나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현재를 속이는 거짓에 불과하다. 〈마담 보바리〉는 환멸에 관한 책이다. 환망공상(幻妄空想)에 갇힌 시골 여자의 삶이 파탄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집도의가 환부를 절제하는 것처럼 가차 없이 기술한다. 낱낱이 해부된 당대의 풍속은 불편하고 황량하다. 그래서 작품이 발간된 1857년 작가는 간통을 미화한 혐의로 기소됐다. 같은 해에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도 비슷한 이유로 법정에 섰다. 돈과 연줄이 있던 플로베르는 ‘유전무죄’, 빈털터리였던 보들레르는 ‘무전유죄’였다. 게다가 〈마담 보바리〉를 비난했던 검사는 뒷날 직접 음란물을 써서 주변에 돌렸다고 한다. 환멸을 다룬 소설답게 다시금 ‘내로남불’을 자아내는 대목이다.

시골 의사 부인의 간통극

3부로 구성된 소설은 검사의 공격처럼 시골 의사의 아내가 저지른 간통극이다. 1850년대 프랑스 사회가 이혼을 허용하지 않았던 만큼 불륜은 만연했고 대중적인 소재였다. 왜 간통이었을까. 무엇보다도 간통은 환상과 현실을 극명하게 나눈다. 무던한 남편과 딸을 둔 범속한 유부녀가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새롭게 태어나려면 애인을 둬야 한다. 반전은 불륜의 일상화다. 간통도 지속하면 부부 관계처럼 흥미와 긴장을 잃게 된다. 머릿속에 심어진 낭만적 욕망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려는 것은 무모한 시도이며 흔히 비극을 불러온다. 연애소설의 주인공에 대한 모방 욕망을 자기의 진짜 욕망이라고 착각하는 일은 거짓의 삶이기에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마담 보바리〉에 담긴 ‘소설적 진실’이다.

작품은 보바리 부인의 남편 샤를이 도회지 중학교에 들어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평생 돈 쓰기가 주특기인 아버지와 아들에게 모든 것을 거는 어머니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간신히 속성 의사가 됐지만 일종의 사기 결혼을 당한 샤를은 왕진을 하러 갔다가 처녀 엠마를 만나게 되고 부인이 죽은 뒤 그녀와 재혼을 하게 된다. 평온한 일상에 만족하는 ‘닥터 보바리’와 달리 ‘마담 보바리’는 행복하지 않다. 수녀원 학교에서 읽었던 연애담과 같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다. 아내는 몽상가고 남편은 둔감하다. 불문학자 김화영에 따르면 보바리가 프랑스어로 ‘소’와 비슷한데 어리석은 부부를 비유하는 듯하다.

욕망의 렌즈로 현실 왜곡

남편에게 실망한 엠마는 뭔가 사건을 기대한다. 이사지인 용빌은 마담 보바리의 모험이 시작되는 공간이다. 공증인 사무실의 서기인 청년 레옹은 말벗이 되어준다. 그러나 소심한 레옹은 고백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파리로 떠난다. 일상의 권태와 불만에 시달리다가 신부를 만나러 가지만 동문서답에 막혀 가슴은 답답해만 가는데 바람둥이 로돌프를 만나서 불륜에 빠지게 됐다. 속이 빤히 보이는 로돌프의 말과 글을 왜 엠마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을까. 순진해서가 아니라 욕망의 렌즈로 현실을 굴절시켜서 보기 때문이다. 운명 탓을 하며 떠나간 로돌프를 대신한 인물은 플라토닉 러브로 그쳤던 레옹이다. 수도 파리의 세례를 받은 레옹은 시시한 ‘촌구석 여인’에게 자신감을 갖고 대담한 밀회를 계속한다. 엠마의 사치와 낭비는 가계를 벼랑 끝으로 밀고 갔다. 결국 비소를 입에 털어 넣은 그녀는 숨을 거두고 얼마 뒤 남편도 죽고 홀로 남은 딸아이는 가난한 친척 집에 보내져 방직공장에서 일하게 된다.

환상을 통해서 보는 현실은 불만 그 자체다. 이것보다 저것을 갖고 싶고 이곳이 아닌 저곳을 가고 싶다. 괴롭고 외로운 나날의 연속이다. 그렇게 일상에 금이 가다 보면 ‘빗물받이 홈통이 막혀 집안의 테라스가 연못을 이루게 되는’ 것처럼 생활은 붕괴한다. 낭만을 추구한 엠마는 어린 딸을 공장에서 일하는 신세로 전락시켰다. 상상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는 그래서 위험하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대혁명의 약속은 학교도 가지 못하는 고아 소녀의 결말을 통해 공염불이 되었다는 것을 작가는 환기한다. 4.19부터 촛불혁명까지 끈질긴 분투에도 오히려 갈수록 양극화로 치닫는 우리 사회 또한 19세기 중엽 〈마담 보바리〉의 세계와 오십보백보가 아닐까.


정승민


교양 팟캐스트 ‘일당백’ 운영자


※이번 기획은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아 연재합니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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