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시론] “이전과 같이 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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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근 부산교육대 윤리교육과 교수

북한이 미국에 못 박은 핵 협상 시한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다행히 최근 북·미 간 대화 재개의 가능성이 보이고 있어 다시금 기대가 된다. 올해 10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실무협상이 결렬된 이후 처음으로 북·미 간 대화에 긍정적인 신호가 오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17일 한·미 국방 당국은 11월 중순에 실시할 예정이었던 연합 공중훈련을 전격 연기했다. 북한이 지속해서 문제 삼았던 연합훈련을 연기해 실무협상 재가동을 위한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앞서 11월 13일 북한은 “미국은 머지않아 더 큰 위협에 직면할 것”이라며 최후통첩에 가까운 경고를 한 바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직속 기관의 최초 담화라는 점에서 수위는 가장 높았다.

페레스트로이카도, 아세안 출범도

이전 시대와의 결별이 출발점

북·미 핵 협상 시한 연말 임박

한발씩 양보해 새 시대 열어야

연내 극적 타결 쉽지 않다 해도

잠정 합의로 대화의 끈 유지되길

한·미가 훈련 연기를 발표하기 직전에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이 훈련 조정 가능성을 내비쳤을 때, 북한의 김명길 외무성 순회대사와 김영철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위원장은 연이은 담화에서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미 연합훈련이 연기된 가운데 공은 이제 북한에 넘어가 있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은 독일 주간지 슈피겔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30년 전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정책에 대해 지금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며 당시 그렇게 했던 이유에 대해 “이전과 같이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얼마 전 부산에서 한·아세안 대화 관계 수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가 열렸다. 동남아 10개국 연합체인 아세안은 거대한 인구와 안정적인 경제성장률로 머지않아 세계 제4위의 경제권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아세안의 출발은 1967년 8월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 5개국이 참여한 ‘방콕 선언’이다. 식민 지배의 아픔을 겪은 동남아 국가들이 전쟁의 위협을 줄이고 지역 안정을 이루고자 협력했던 것도 “이전과 같이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최근의 북·미 간 대화 신호가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남아 있는 짧은 시간 안에 북·미 간 입장이 전격적으로 변하기도 쉽지 않다.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북한과의 직접 대화에 가장 전향적인 트럼프 대통령은 탄핵 문제 등 국내 정치와 관련된 행보로 인해 자칫 북한 문제에 집중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양측은 연말 대화를 모색하면서 “이전과 같이 살 수는 없다”는 점에 무엇보다 공감했으면 한다. 6·25 전쟁과 이후 70년의 적대 관계는 물론 가깝게는 2017년 말과 같은 위험한 시기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북한은 올해 신년사에서 미국과의 핵 협상이 불발하면 ‘새로운 길’을 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북한이 염두에 둔 새로운 길은 북·중·러 간 진영론에 기반한 무력 도발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길이 아닌 이전처럼 대립하는 길일 뿐이다. 다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할 경우, 유엔 안보리는 중국의 대북 원유 공급이나 관광 분야에도 제재를 가할 것이다. ICBM 대신 신형 잠수함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 발사될 수도 있다. 북한이 새로 건조했다며 잠수함을 계속 공개했고 수중 발사대(혹은 바지선)에서 신형 SLBM이라며 시험 발사했던 것은 차후 ‘신형 잠수함에서의 SLBM 발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경우든 대북 제재만 가중될 뿐 북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게 된다.

북·미 양측은 올해 남은 기간을 잘 관리해야 한다. 정상회담을 통한 극적 합의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이전과 같이 살 수는 없다”는 전제 아래 한 걸음씩 물러나야 한다. ‘잠정 합의’로 대화의 끈이 내년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올해의 협상 시한을 연장해 내년에도 협의가 지속될 수 있도록 서로가 명분을 찾아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북한이 연말 시한을 고집하면 내년 협상으로 이어질 명분을 스스로 줄이는 것이다. 미국은 구체적인 대북 제안을 통해 북한이 협상 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정부 역시 북·미 협상 환경 조성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최근 북한이 남북 협력의 상징인 금강산 관광 문제로 남한을 압박하는 것은 남한의 적극적인 대미 역할을 재촉하는 것이다. 지난주 북한이 동해에 단거리 미사일과 초대형 방사포를 발사한 것도 협상을 앞둔 무력시위이다. 정부는 당장의 북한 움직임에 조급히 반응하기보다는 안정적인 상황 관리와 북·미 실무협상 재개를 위해 다각도로 노력해야 한다. 연말 북핵 협상 시한을 앞둔 남·북·미 모두가 “이전과 같이 살 수는 없다”는 전제에 주목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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