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청중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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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교감하는 동물이다. 교감이 빚는 쾌락의 강도는 집단적일수록, 직접 접촉일수록 강렬하다. 특히 문화예술과 스포츠, 종교 영역의 상호교감이 이를 가감 없이 잘 증명한다. 거기 열광하는 청중(관중)이 있다. 예컨대, 흑인 블루스 음악은 아예 싸구려 술집에서 청중과 함께 박수치며 탄생한 것이다. 대중문화 공연은 늘 거대한 청중이 어우러지면서 몸집을 불려 왔다.

청중을 본격적으로 불러 낸 건 클래식 음악이다. 음악 소비층이 서양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바뀌던 시대와 관련 있다. 후기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이룬 음악계의 가장 큰 변화가 바로 청중이다. 사교가 아니라 음악을 들으려고 표를 사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근대 고전음악은 청중과 더불어 탄생했다”(와타나베 히로시 <청중의 탄생>)는 단언은 이제 통설이다. 1920년대에는 카바레 음악이 있었다. 지금처럼 고전음악 공연이 진지하거나 조용하지 않았다. 이미 19세기 말에 리스트는 꽃미모와 화려한 피아노 기교로 수많은 팬을 몰고 다녔다. 연주 후 대기실이 인산인해를 이룬 모습은 지금의 ‘아이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20세기 지휘자로서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인물로 레너드 번스타인이 있다. 무대에서의 친절한 해설은 음악 누리는 삶의 행복함을 깨우쳐 주었다. 놀랍게도 시인 중에서도 역대급 무대를 꾸민 이가 있다.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이다. 1956년 미국 미네소타대학에 초청된 그의 강연회에 전용 축구장이 필요했을 정도다. 1만 5000명이 모인 그 장면은 서양문학사상 가장 웅장한 것으로 손꼽힌다.

최근 몇 달 새 코로나19가 무너뜨린 것은 인간의 육체뿐만이 아니다. 교감을 생명으로 하는 인간 정신의 한 축을 뒤흔들었다. 스포츠의 제전인 전 세계 스타디움에 불이 꺼진 지 오래다. 스포츠에서는 모두가 함께 응원할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지금 그것을 파고들고 있는 게 온라인이다. 클래식 분야에서 점점 무관중 공연과 공연 중계가 늘어나고 있다. 종교나 미술 행사도 그 뒤를 잇는 형국이다.

날것으로서의 인간 공동체에는 늘 청중이 있었다. 청중이 부재하고 인간의 원초적 지향이 꺾인 지금, 오히려 청중의 소중함이 느껴진다. 그것을 알게 된 것 또한 코로나 사태가 안긴 풍경이다. 그런 것처럼 미래 또한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장의 청중은 잠시 사라졌지만 온라인이라는 형식을 통해 청중은 새롭게 재발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상은 변하고 있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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