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선의 해양 TALK] 은광 장수 기업 ‘콩스버그’의 위기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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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양수산개발원 선임연구위원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624년, 조선에서는 인조가 집권 2년 차를 맞고 있던 때였다. 광해군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 데는 성공한 인조였지만, 얼마 안 있어 터진 이괄의 난으로 야밤에 충남 공주로 몸을 피한 처지였다.

같은 시기, 유라시아 대륙 건너편 북유럽의 노르웨이에서는 은광이 터졌다. 오슬로 옆의 작은 마을인 콩스버그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콩스버그는 덴마크·노르웨이 왕의 영지였다. 마을 이름도 크리스티앙 4세가 하사한 ‘콩스(king) 버그(mountain)’로 ‘왕의 산’이라는 뜻이다.

노르웨이의 장수 기업 ‘콩스버그’
200년 전 은광 내 한 공장으로 시작

위기 때마다 발빠른 혁신으로 대응
해양에서 항공·우주산업까지 망라

세계 첫 상업적 자율운항 선박 성공
미래 흐름 예측 재빠른 대처로 활로


이곳에 은광이 개발되면서 화폐 주조창 등이 들어서고, 독일 등지에서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밀려들었다. 광업에 필요한 기술도 속속 개발됐다. 은광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 생태계도 만들어졌다. 은광 산업이 절정에 올랐던 18세기 후반 이곳의 인구는 1만 2000명까지 늘었다.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국민소득(GNP) 10%를 차지할 정도로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영화는 끝없이 이어지지 않는 법이다. 19세기 들면서 은광은 속 빈 강정으로 변했다. 경제 빙하기가 찾아오면서 실업자가 늘기 시작했고, 도시는 파산 공포에 내몰렸다.

1814년 3월 은광 감독관이 공장 하나를 세우게 된다. 도시 이름을 딴 ‘콩스버그 무기 공장’이었다. 오늘날 200년 장수 기업으로 성장한 콩스버그 그룹이 탄생한 배경이다. 이 회사는 해양 플랜트와 방산 무기 생산, 우주·항공 산업, 디지털 분야를 아우르는 4가지 사업 분야를 중심으로 하는 글로벌 기술·지식 집약 기업이다.

이런 콩스버그가 최근 해양 분야에서 가장 핫한 기업 중 하나로 떠올랐다. 지난 2월 13일 세계 최초로 선박의 상업적인 자율운항에 성공한 것이다. 승객을 태우고 노르웨이 연안에 페리 항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콩스버그 해양(Kongsberg Maritime)과 페리 선사, 노르웨이 해운 당국이 힘을 합쳐 이룬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현지 언론은 특필했다. 이 선박이 뉴스의 초점이 된 것은 최근 몇 년 사이 해운·조선업계의 치열한 자율운항 선박 개발 경쟁에서 가장 먼저 테이프를 끊었기 때문이다.

첨단 기술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가는 콩스버스의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전문가들은 콩스버그 창업 200년의 경영 혁신 노하우와 기업가 정신, 그리고 미래 산업의 트렌드를 정확하게 읽고 과감하게 투자하는 전략에서 찾는다.

창업 초기에는 은광 기술을 무기 생산으로 돌리면서 도시의 성장 패러다임을 바꿨다. 콩스버그는 자체 개발한 소총을 국방부에 납품하면서 산업 전환에 성공한 후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무기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종전 이후엔 민간 부문에서 성장 모델을 찾았다. 스패너, 플라이어 등으로 민간 공구 시장에 본격 진입하는 변신을 시도했다. 자동차 시장이 열린 뒤에는 차축과 차량 부품에 이어 선박 부품, 다리미, 재봉틀까지 만들며 시장을 이끌었다.

콩스버그가 성장의 변곡점을 맞은 것은 1987년 이후 10년 동안이다. 1987년에 노르웨이 정부가 보유 주식을 매각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콩스버그 그룹으로 자리 잡았다. 1997년에는 콩스버그 해양까지 인수하면서 그룹의 주력 사업이 해양과 군수물자 생산, 항공·우주산업으로 짜였다.

2016년 들어 콩스버그 디지털 설립, 2019년 롤스로이스의 해양 부문 인수도 신성장 모델을 찾기 위한 선제적인 투자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롤스로이스의 해양 부문 인수는 콩스버그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해운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라는 지적이다.

콩스버그는 최근 해양 산업이 위축되자 무인 무기 시스템 개발이라는 신산업 쪽에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신기술 개발과 신시장 개척이라는 콩스버그의 200년 경영 DNA가 그렇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독립 이후 자국이 필요로 하는 무기 제조에 눈을 돌려 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나, 산업 핵심 기술을 개발하여 글로벌 첨단 기업으로 도약하는 경영 전략은 1814년 창업 당시부터 2020 현재까지 변함이 없다.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지금 전 세계 경제는 말이 아니다. 부산의 살림살이도 더 어려워졌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퍼펙트 스톰’이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산업 구조와 교역 질서가 크게 바뀔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기업의 근무 형태는 물론 생활 스타일도 크게 변할 것이다.

2020년 3월 이전의 세상은 다시 오지 않는다. 나쁜 경험은 한 번이면 된다. 산업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흐름을 예측하고, 시대 변화에 재빠르게 대처하는 것이 정답이다. 400년 광산 도시 콩스버그와 200년 장수 기업 콩스버그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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