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익의 참살이 인문학] 작지만 큰 의인(醫人)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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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예로부터 작은 의사(小醫)는 병을 고치고(醫病), 보통 의사(中醫)는 사람을 돌보며(醫人), 큰 의사(大醫)는 나라를 다스린다(醫國)고 했다. 그래서 기근이 생기거나 역병이 돌아 백성이 괴로우면 의국에 실패한 임금이 불인(不仁)한, 즉 어질지 못한 탓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불인이라는 말은 몸의 어느 부분이 마비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거나 감각이 둔해진 상태를 일컫는 한의학 용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질다는 뜻의 한자 인(仁)은 두(二) 사람(人)을 형상화한 것이다. 병과 사람과 나라를 돌보는 이치가 모두 ‘어짊(仁)’이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태어난 맥락과 배경이다.

과학을 중심으로 한 서양 의학과 돈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는 자본주의가 주류가 된 이후 이런 이념을 더는 지키기 어렵게 되었다. 병은 물리적 신체에 생긴 이상 현상이고, 사람은 신체와 그 주인인 자아의 종합이며, 나라는 그런 사람들의 집합으로 여겨졌다. 이제 병은 기계인 신체의 고장이고, 신체는 의약품이 소비되는 시장이며, 병원균과 싸우는 전쟁터가 되었다. 그래서 인술이던 의술이 기술(技術)과 전술(戰術)과 상술(商術)이 되어 버렸다는 한탄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무료인 코로나19의 진단을 위해 100만 원 가까운 돈을 써야 한다는 과학적 의학과 자본주의의 종주국 미국의 상황이 바로 그렇다. 이 사태를 관리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어떤 지방 정부의 장이 내세운 ‘코로나19 박살’이라는 구호 속에도 이 사태를 전쟁으로 여기는 일차원적 인식이 깔려 있다.

 병과 사람 돌보는 이치는 어짊에 바탕
 현대에선 의술이 기술과 상술로 전락
 코로나 환자 돌보는 의인에게 박수를

여기서 질병을 세포 단위에서 연구한 세포병리학의 창시자 루돌프 피르호(1821-1902)의 삶을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우리 몸을 세포들이 모여 사는 공화국으로 여겼다. 건강은 세포들의 민주주의가 완성된, 질병은 그렇지 못한 상태다. 그는 세포를 연구했지만, 그로부터 몸과 나라의 조직 원리로 나아갔다. 1847년 발진티푸스가 창궐한 지역에 책임 조사관으로 파견된 그가 제출한 보고서는 그가 창시한 사회 의학과 공중보건학의 고전이다. 그는 시혜적 정책이 아닌 ‘제한 없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처방으로 제시했으며, 이후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다. 나라를 바로 세워(醫國) 사람을 치유(醫人)하고 병을 고치는(醫病) 서양식 큰 의사(大醫)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바이러스는커녕 세균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시절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초·중반까지도 인류의 가장 큰 사망 원인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결핵의 경우를 보면 조금은 더 겸손할 수 있게 된다. 결핵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결핵균의 발견과 치료제의 발명과는 관계없이 이미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결핵은 몸속에서 번식하는 세균으로 인한 것이지만, 19세기 중반 이후 꾸준히 개선되고 있는 영양 상태와 주거환경이 그 세균이 번식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나라와 사람을 돌보아 병을 다스리는 편이 직접 병균을 박멸하는 것보다 효과적이라는, 그리고 세균은 박살의 대상이 아니라 지나치게 증식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악동(惡童)과 같은 존재로 여겨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1918년 지구 전체에서 4천만, 식민지 조선에서만 14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이 일으켰을 공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이 어마어마한 병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1차대전 말기였던 각국 정부가 정보를 철저히 통제했기 때문이다. 중립국이던 스페인만이 예외였는데 이 병에 스페인 독감이란 이름이 붙여진 게 그 때문이라고 하니 엄청난 아이러니다.

2020년 코로나19로 온 세상이 공포에 떨 때 차분하게 대응하고 있는 한국에 주목하는 눈길이 따뜻하다. 질병관리본부 등 행정기구가 총동원되고,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며(醫國), 발 빠르게 진단키트를 개발하고 대규모 검사를 시행하는 등 바이러스의 확산을 차단하며(醫病), 불편한 방호복 속에서 땀 흘리며 환자를 돌보는(醫人)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우리 모두 작지만 큰 의인(醫人)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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