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함께하는 고개와 길] 676. 달맞이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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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 열다섯 고개, 굽이굽이 인생길 닮아

해운대 달맞이고개 전경. 해운대 미포에서 송정으로 이어지는 달맞이고개는 사람이 꽃이고 꽃이 사람인 벚꽃 길이다. 길이 열다섯 번이나 휘어져 15곡도(曲道)라고도 한다. 박정화 사진가 제공

달맞이고개는 벚꽃 길이다. 벚꽃이 펴서 지기까지, 그리고 져서 피기까지 행락객이 넘친다. 누구는 피는 꽃이나 지는 꽃을 보며 지나가고 누구는 피는 잎이나 지는 잎을 보며 지나간다. 꽃 또는 잎이 폈을 때나 꽃도 잎도 졌을 때나 달맞이고개는 한결같다. 한결같이 벚꽃 길이다.

벚꽃은 다 다르다. 다 같아 보여도 다 같은 벚꽃은 하나도 없다. 피는 때 지는 때가 다 다르며 빛깔이며 생긴 게 다 다르다. 연한 꽃잎, 더 연한 꽃잎. 구부린 꽃잎, 더 구부린 꽃잎. 꽃이 맺히는 나뭇가지 높이도 다 달라 달맞이고개에선 다 같은 벚꽃이 하나도 없다.


1983년 국토 공원화 사업 전국적 물결
당시 구청장이자 수필가였던 채낙현
벚나무 심고 ‘달맞이’라고 이름 붙여
“꽃이 사람이고 사람이 꽃인 벚꽃 길”

달맞이고개 옛길 표지판.

사람 역시 다 다르다. 벚꽃을 눈에 담아 가는 사람, 마음에 담아 가는 사람. 벚꽃만 보는 사람, 벚꽃 너머까지 보는 사람. 벚꽃이 사랑인 사람, 이별인 사람. 꽃도 다 다르고 사람도 다 달라 종내에는 꽃이 사람이고 사람이 꽃인 달맞이고개 벚꽃 길. 달맞이고개는 한결같다. 사람이 꽃이고 꽃이 사람이다.

달맞이고개는 언제부터 벚꽃 길이 됐을까. 다른 말로, 언제 벚나무를 심었을까. 달맞이고개가 벚꽃 길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만, 언제부터 벚꽃 길이 되었는지 아는 사람 역시 드물다. 벚나무가 굵직하고 듬직해서 대개는 고갯길 역사만큼이나 오래됐으리라 짐작한다. 과연 그럴까.

짐작과 달리 달맞이고개 벚꽃의 역사는 의외로 짧다. 사십 년이 채 안 된다. 1983년 벚나무를 심었으니 정확하게는 37년이다. 벚나무는 원래 그렇다. 잘 크고 금방 큰다. 그리고 우아하다. 땅 척박하고 바닷바람 모진 섬나라 일본이 한국 토종 왕벚나무를 개량해 섬나라 곳곳에 퍼뜨린 이유다. 한국 왕벚나무는 일본 벚나무 선조다.

왜 1983년일까. 국토 공원화 사업이 그 무렵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사천만 푸른 의지로 아름다운 국토 경관을 이루자’는 구호를 내걸고 전 국토 공원화에 나서던 때가 그때다. 해운대에선 달맞이고개 공원화가 과업이었다. 구청 공무원이 고갯길에 자연석 쌓고 벚나무를 심었다. 그해 7월 30일 ‘달맞이동산’ 기념비를 고갯길 정상에 세웠다. 기념비는 지금도 당당하다.

‘이곳을 지나는 길손들이여. 걸음을 멈추어 지난날 힘겨웠던 우리들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다시 걸어가야 할 내일의 꿈속에 이 아름다운 동산을 담아 바람과 바다와 청산을 노래할지어다.’

달맞이고개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달맞이언덕, 달맞이동산 등이다. ‘달맞이’란 명칭은 당시 구청장이던 채낙현 수필가(1930~2004)가 처음 붙였다. 해운대구는 1980년 4월 출장소에서 구청으로 승격했다. 초대 정철진 구청장에 이어 채 청장이 1982년 9월부터 1984년 5월까지 2대 구청장을 맡아 반듯한 해운대, 제대로 된 해운대 만들기에 애썼다. 달맞이고개 벚꽃 역시 채 청장 작품이다. 수필가답게 길손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격문을 기념비 아래 남겼다.

15곡도(曲道). 달맞이고개 또 다른 명칭이다. 해운대와 송정을 잇는 구불구불 고갯길이 열다섯 번이나 굽어서 얻은 이름이다. 일일이 헤아려 보진 않았지만 굽은 횟수는 열다섯 번이 맞거나 비슷할 것이다. 그 정도 굽어지지 않고서 어찌 고갯길이겠는가. 굽이굽이 인생길도 그렇다. 그 정도 굽어지지 않고서 어찌 인생길이겠는가.

역사적 인물 가운데 구불구불 고갯길을 맨 먼저 걸은 이는 누굴까. 누구누구 들먹일 것도 없다. 단연 최치원이다. 신라 문장가 최치원이 해운대에 대를 쌓고 머물렀다는 문구가 500년 전 고서에 나온다. 최치원이 모셨던 여왕 또한 신병을 치료하려고 해운대 온천을 들렀다. 여왕 일행이야 험준한 육로 대신 편안한 뱃길로 다녔을 터. 성골도 아니고 진골도 아닌 최치원은 고갯길 넘고 넘어 해운대에 이르렀지 싶다. 송정 쪽에서 해운대로 오는 유일한 육로가 달맞이고개였다.
해운대 상공에서 본 1960년대 달맞이고개 모습. 해운대구청 제공

물론 그 옛날 고갯길과 지금의 달맞이고개는 전혀 달랐다. 자동차 다니는 지금의 고갯길은 1969년 11월 7일 착공해 1970년 7월 28일 완공했다. 그 이전 한국전쟁이 나고 부산 곳곳에 미군이 주둔할 때는 고개를 품은 미포 와우산 일대에 미군 전용 골프장이 들어섰다. 1968년까지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와우산 20만 평 넘는 땅을 소유했다. 1975년에는 미국에서 대외 원조를 담당하는 AID(국제개발처) 돈으로 지은 주공 AID아파트 45동, 2060가구가 들어섰다.

옛길은 죄다 지워지진 않았다. 옛 지도에 우현(牛峴) 또는 우치(牛峙)로 나오는 옛날 고갯길과 달맞이고개로 불리는 지금 고갯길은 전체적으론 달라졌지만 길이 닿으려고 했던 데는 같았다. 길이 닿으려고 했던 데는 옛날도 지금도 해운대며 송정이다. 그러기에 해운대 다 가서 옛길이 좀 남아 있고 송정 다 가서 좀 남아 있다. 송정 옛길엔 표지판을 세워 두었다. 표지판 가리키는 데로 가면 짧지만 곱다란 옛길이 나온다.

옛길과 새길. 따지고 보면 크게 다르지도 않다. 가능하면 옛길을 살려서 새로 길을 놓는 까닭이다. 달맞이고개 옛길은 지름길로 질러서 갔고 새길은 풍광 빼어난 해안으로 둘러서 간다. 그 둘을 굳이 같은 길이라고 우길 이유는 없다. 굳이 다른 길이라고 우길 이유도 없다. 옛길이나 새길이나 길이 닿으려고 했던 데가 같아서다. 사람이 꽃이고 꽃이 사람인 달맞이고개에선 옛길이 새길이고 새길이 옛길이다.

‘(…)헤어지자/섬세한 손길을 흔들며/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나의 사랑, 나의 결별/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내 영혼의 슬픈 눈.’ 고갯길 걸으면서 읊을 만한 시(詩), 이형기 ‘낙화’는 어떨까.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아서 분분하게 날리는 꽃잎이 시의 주인공이다.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이 대목을 읊조리면 ‘영혼의 슬픈 눈’에 눈물이 핑 돈다. 벚꽃이 사랑인 사람도 그렇고 결별인 사람도 그렇다. 날리는 벚꽃에 맞으면 맞는 족족 시퍼런 멍이 든다. 누구나 그렇다.

▶가는 길=시내버스 39, 100, 139, 141, 180, 200, 1003번을 타고 미포·문탠로드 입구에서 내리면 된다. 도시철도 2호선 중동역 5번이나 7번 출구로 나와 곧장 가도 된다. 동길산 시인 dgs1116@hanmail.net






19세기 초 지도 ‘광여도’ 해운대 부분. 오른쪽 가운데 보이는 ‘우현(牛峴)’이 달맞이고개 옛 이름이다.


달빛에 마음 태우며 걷는 황톳길

문탠로드

다 좋은 사람이 없듯 다 좋은 길은 없다. 약점이 한둘은 있다. 달맞이고개 약점은 길이 포장돼 있다는 것. 해운대 미포에서 송정으로 이어지는 전 구간이 포장도로다. 인도에는 방부목을 깔았지만 차가 내달려서 길 걷는 즐거움이 반감된다. 그러기에 달맞이고개 바로 아래 황톳길 문탠로드는 보배다, 보배.

문탠로드는 미포에서 청사포까지 이어진다. 나무를 양옆에 거느린 산책로다. 바다를 끼고 있어서 파도 소리가 스며들었다. 휘영청 달이 뜨면 나무 사이로 바스러지는 달빛이 일품이다. 그런데 말이 어렵고 낯설다. 문탠로드가 뭐지? 누가 물으면 이렇게 얼버무리며 넘어간다. 선탠이 햇빛으로 살갗을 태우는 거라면 문탠은 달빛으로 마음을 태우는 것!

청사포 오솔길은 문탠로드와 맞닿은 산책로다. 청사포에서 송정까지 이어진다. 군인이 해안을 감시하던 참호가 곳곳에 있는 참호길이라서 ‘뷰’가 빼어나다. 시로 치면 걸작이고 노래로 치면 절창이다. 청사포에는 청사포가 종점인 마을버스가 있고 쌍둥이 등대가 있고 갓 잡은 해산물을 파는 해녀가 있다. 해상 전망대는 꼭꼭꼭 둘러볼 것! ‘청사포 다릿돌전망대’란 이름을 여기 이 사람이 추천했다. 가가(呵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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