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볼까, 헛헛한 마음 달래 주는 그 미소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우리동네 즐기기] 함안 마애사·채미정

1200년 역사를 담고 있는 마애불이 경남 함안 방어산 중턱에서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다.

노란 개나리꽃이 산길을 따라 화사하게 피었다. 길 아랫마을에는 하얀 목련꽃이 환하게 웃고 있다. 달리는 차량이 드물어 도로는 한산하다. 흐르는 공기와 바람도 덩달아 느긋해 보인다. 경남 함안군 군북면으로 가는 길은 시간이 멈춘 채 봄 향기만 가득하다.

방어산 중턱 전망 시원한 마애사
700m 더 오르면 약사여래 마애불
몸과 마음에 건강한 기운 가득
생육신 조려 추모해 지은 채미정
대청마루 앉으면 세상 시름 잊혀 

마애사 극락보전.

■마애사 마애불

마애사는 방어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절 전망대에 서면 아래로 환하게 펼쳐진 풍경이 눈을 시원하게 만든다. 낙동마을과 낙동소류지, 일주문을 지나면 마애사 주차장이 나타난다. 목적지는 마애사를 지나 700m가량 올라가면 나타나는 마애불이다. 정식 명칭은 마애약사여래삼존입상이다.

약사여래는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는 부처이다. 그래서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다. 마애사를 찾은 것은 코로나19를 피해 방구석에만 있느라 굳은 몸을 풀어주고, 세계에 만연한 전염병을 퇴치해달라고 마음으로나마 빌어보기 위해서다.

주차장을 지나 올라가는 길 담벼락에 부처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앞에는 부처의 제자들인 존자 석상 여러 개가 있다. 다들 다양한 표정과 자세로 앉거나 서서 산 아래 세상일을 두루 살펴보고 있다.

거북 샘물 뒤편에 대웅전 격인 ‘극락보전’이 서 있다. 공사를 하려는 것인지 철골 자재들이 세워져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탓에 당분간 공양을 중단한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첩첩산중이라도 세속의 일과 무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올라가는 길 언덕에 개나리가 줄지어 피어 있다. 환한 햇빛이 개나리를 바로 비추고 있어 마치 황금이 빛나는 것처럼 눈을 바로 뜰 수 없을 지경이다. 햇살이 밝게 내리비치는 밭에서 한 보살이 햇빛 가리개를 쓴 채 밭을 뒤덮은 쑥을 캔다. 대야에 가득 담긴 쑥에서 향긋한 봄 냄새가 피어난다. 쑥밭 아래 담장 앞에는 여러 가지 음식 재료를 담은 항아리 수십 개가 봄 햇살을 온몸에 받고 있다.

밭 뒤로 좁은 길이 보인다. 여기서부터 제법 땀을 흘리며 산에 올라가야 마애불에 닿을 수 있다. 한 젊은 여성이 등산용 지팡이 하나를 들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딘다.

방어산은 높지는 않지만, 암반이 많고 경사가 제법 가파르기 때문에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은 산을 타는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맨 흙길이거나, 또는 나무나 돌로 계단을 만들어 놓은 길을 한참 걷다 보니 어느새 땀이 흐른다. 선선한 바람 사이로 내리쬐는 봄 햇볕이 꽤 따뜻한 탓이다. 마음은 아직도 겨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몸은 봄이 온 것을 벌써 본능으로 알고 있다.

느긋하게 쉬어가며 30분쯤 산을 올라가자 저만치 앞에 큰 바위가 보인다. 목적지인 마애불이다. 꽤 오래된 편평한 바위 표면에 세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가 약사여래고, 양옆은 해와 달을 상징하는 일광보살, 월광보살이다. 약사여래는 왼손을 배꼽 앞으로 올려 약그릇을 든 채 연꽃 대좌 위에 서 있다. 머리에는 부처의 크고 높은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가 솟아 있다. 마애불은 12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월광보살 옆에 ‘(신라)애장왕 2년, 서기 801년에 만들어졌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마애불 앞에서 잠시 합장한다. 남의 집에 왔으면 인사를 하는 게 도리이고, 특히 병자를 치료하는 부처이니 코로나 바이러스에 시달리는 세상을 돌보아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마애불 앞에 잠시 서서 땀을 식힌다. 산 아래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은 곳은 아니지만, 햇살이 잘 들어와 눈을 환하고 맑게 만들어준다. 봄 햇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등 뒤에서는 약사여래가 온기 가득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좋은 기운이 가득 차고 있음을 느낀다.

어계고택.
 
서산서원.


작은 연못과 다리가 예쁜 채미정.


■ 채미정

마애사에서 내려와 원북마을로 달려간다. 세월을 잊고 시간을 벗어나 잠시 공간 속에서만 머무를 수 있는 장소가 주변에 있다. 바로 채미정이다. 원북마을 출신 생육신이었던 조려를 추모하면서 지역 유림이 1735년 지은 정자다. 그는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항의하는 뜻에서 벼슬을 내던지고 귀향해 여생을 보냈다. 그가 지은 ‘구일등고시’가 고대 중국 주나라 백이의 ‘서산채미가’에 견줄 만하다고 해서 채미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채미정의 작은 쪽문은 활짝 열려 있다. 멀리서 나그네가 찾아올 줄 알고 미리 환영하며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자그마한 건물 한 채가 서 있고, 앞에는 아담한 크기의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연못 위로 아치형 다리가 걸려있다. 옛 정취는 없어졌고, 지금은 콘크리트와 철제 난간으로 이뤄진 다리가 관람객을 맞는다.

채미정은 아주 작고 꾸밈없이 소박한 정자다. 이곳에서 화려하고 다양한 체험을 원하면 곤란한 일이다. 지금처럼 따뜻한 봄날 ‘백세청풍’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담장 너머 논이나 산을 무심하게 바라다보면서 잠시 세상일은 모두 잊어두는 게 이곳의 즐거움이다. 가끔 주변을 오가는 봄바람이나, 철없이 재잘거리며 날아다니는 어린 새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세월을 희롱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채미정 한쪽 구석에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다른 곳에서는 매화꽃이 활짝 피었다는데 이 나무에서는 이제 만개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 주말, 이곳을 찾는다면 정자에 앉아 환하게 핀 매화나무와 담소를 나눌 수도 있을 듯하다.

원북마을에는 채미정 외에 서산서원과 어계고택이 있다. 서산서원은 영남 선비들이 조려 등 생육신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703년에 지은 서원이고, 어계고택은 조려가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