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 찬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영화평론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스틸컷. 부산일보DB

시민들의 생활 속 사회적 거리 두기가 조금씩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극장도 관람문화 캠페인에 동참하며 앞뒤 띄어 앉기를 진행하는 등 코로나19를 넘어서기 위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극장에 가는 것을 꺼리는 사람이 많으며, 그로 인해 영화 개봉 또한 줄줄이 미뤄지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몇 주 전부터는 영화관에서 재개봉 영화들을 상영하는 등 여러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지만, 지금의 위기를 타개하기에는 많이 벅차 보인다.

이런 점을 보면 영화는 예술적이라고 하지만, 자본과 매우 긴밀한 관계임을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코로나19로 몇 번씩 개봉을 늦추다가 결국 넷플릭스에서 개봉하겠다고 해서 주목받은 영화나 병(病)이 진정된 후 크랭크인하겠다고 선언한 영화 등을 보면 모두 영화가 자본과 밀접한 관계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와중에 의미 있는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코로나19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개봉한 이 영화는 바로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
극장 어려운 와중 당당히 개봉
독립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직업 잃고 쓸쓸해진 PD 찬실
산동네 이사로 판타지 펼쳐져
‘빛을 만드는’ 찬실에 위로받아

독립영화 프로듀서로 오래 일한 찬실이는 새로운 영화 작업을 시작하려던 찰나에 감독이 사망하면서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된다. 찬실이는 실력은 있다는 평이지만, 한 감독과 너무 오래 일하다 보니 어느 영화사에서도 불러주지 않았던 것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돌아보니 해놓은 건 아무것도 없고 가진 건 더더욱 없고 게다가 직장도, 애인도 없고 불러주는 사람도 없고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 찬실이는 외롭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생계가 막막해진 찬실이는 버스도 다니지 않는 오래된 산동네로 이사간다. 까칠해 보이는 주인집 할머니가 있는 단칸방에 단출한 짐을 푼 찬실이. 새 인생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앞길이 막막하다. 찬실이와 친하게 지내는 후배 영화배우 소피가 자기 집 가사 도우미를 권하자, 찬실이는 일을 병행하면서 PD 일을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 단번에 승낙한다. 하지만 다시 영화 쪽 일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을 포기하는 건 더 어렵다.

그런데 돈 없고 빽 없고 직장도 없고 자식도 없는 찬실이의 인생을 과연 불행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눈 오는 날이 있으면 꽃이 피는 날도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 아니던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평생 달려온 찬실이의 인생에서 지금 아주 조금 비가 내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시종일관 경쾌하고 발랄하지만, 어느 순간 코끝이 짠해지기도 한다.

웃음과 감동을 던지던 영화는 어느 순간 판타지가 개입된다. 이는 찬실이가 PD 생활을 청산하고 산 중턱 마을로 이사 오면서 만나게 되는 집주인 할머니와 장국영이라는 캐릭터로 인해 더 특별해진다. 찬실이는 집주인 할머니에게서 힘들고 고단한 세상이지만, 그런데도 살아갈 수 있다는 위로를 건네받고, 귀신인지 인간인지 헷갈리는 이상한 존재 ‘장국영’에게서 좋아하는 영화 일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또한 그들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삶을 부정하지 않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다. 좀 더 단단한 찬실이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 엔딩에서 후배들이 찬실이 집으로 놀러 온다. 그때 작은방의 전구가 나가고 그들은 모두 함께 전구를 사러 어둡고 깊은 산길을 내려가는데 이 씬은 무척 흥미롭게 보인다. 찬실이는 자신의 앞이 보이지 않는 건 신경 쓰지 않고 후배들의 길이 잘 보이도록 전등불의 빛을 비춰주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찬실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빛나는 존재이기 보다는, 뒤에서 남몰래 빛을 만드는 존재였다. 그것이 바로 찬실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만드는 일(PD)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