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849. 세계적 대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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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요즘 자주 등장하는 말 중에 オ-バ-シュ-ト(overshoot, 감염 폭발), クラスタ-(cluster, 집단 감염), ロックダウン(lockdown, 도시 봉쇄), パンデミック(pandemic) 등이 행정 문서와 미디어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일본어로도 충분히 의미가 전달됨에도 왜 굳이 이런 가타카나를 남발하듯 즐겨 쓰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일본 중앙학원대학 이헌모 교수가 얼마 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이 교수 지적마따나 일본은 정말 외래어를 많이 쓴다. ‘평가절하’라는 말이 있는데도 ‘데바류에이숑(デバリュエ-ション·devaluation)’이라 쓰고, ‘맥주, 학급’이 있는데도 ‘비루(ビ-ル·beer), 쿠라스(クラス·class)’라 쓰는 식이다.

한데, 요즘 우리나라를 보자면 저런 방식을 비웃을 일만도 아니다. 아래는 어느 신문 칼럼 구절.

‘코로나19는 한국에서 에피데믹(epidemic)에서 팬데믹(pandemic)으로 폭풍우가 됐다.’

이런 외래어는 요즘 우리 신문·방송이나 누리소통망(SNS)에서 어렵지 않게 맞닥뜨린다.

그동안 우리나라 외래어 유통(?)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사람들 입에 익을 만큼 널리 퍼진 뒤에야 국립국어원이 나서서 표기법을 정하거나 순화어를 발표해 왔던 것. 한발 늦은 대응 때문에 고치는 데 시간과 비용이 들 수밖에 없었다. 원칙을 강조하다가 ‘자장면/짜장면’처럼 현실을 인정해 둘 다 허용하는 경우도 잦았다.

대응이 느리다는 비판이 효험을 봤는지, 드디어 국립국어원이 지난해 9월 사람을 모아 ‘새말모임’ 시범운영을 시작했다. 국립국어원은 이 모임을 이렇게 정의한다.

*새말모임: 어려운 외국어 신어가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들이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 대체어를 제공하기 위해 국어 전문가 외에 외국어, 교육, 홍보·출판, 정보통신, 언론 등 다양한 분야 사람들로 구성된 위원회로서, 누리소통망(SNS)을 통해 진행됨.

그리고 여기서 최근 결정한 대체어가 바로 ‘(감염병)유행, (감염병)세계적 (대)유행, 동일 집단 격리, 승차 진료(소)/승차 검진’이다. 한국말 언중이 여기서 이해하지 못할 말은 없겠는데, 그렇다면 굳이 이 말들 대신 ‘에피데믹, 팬데믹, 코호트 격리, 드라이브스루’를 쓸 필요가 있나 싶다.

낯선 외래어나 외국어 남용은 정보 소외를 부른다. (지식을)가진 사람이 (정보나)재화 획득에 더 유리한 구조는 운동장을 기울게 만들고 결국 사회 불안과 불평등을 부른다. 언어 민주화가 없으면 정보 민주화도 없고 경제 민주화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살기 좋은 세상은, 말을 잘 몰라서 불이익을 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일 터.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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