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수의 소설과 세상] 마스크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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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밀다원시대 문학축제 운영위원장

지난 화요일 오후의 일이다. 고장 난 휴대전화를 맡기려 서비스센터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웬 사람들이 약국을 향해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순간 오늘이 출생 연도 끝자리가 마스크 5부제에 해당하는 요일이라는 아침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얼른 줄의 끄트머리에 가 섰다. 그간 외출을 되도록 삼가고 있었음에도 황사와 미세먼지 대비용으로 작년에 구입했던 마스크 여분이 동이 난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예방적 거리를 의식해서인지 30여 명 남짓한 행렬임에도 줄은 무척 길게 보였다.

마스크 구입 위해 긴 줄 서는 진풍경
당국의 무능이라고밖에 볼 수 없어
기다리던 두 노인 “먼저 가져가라” 양보
화만 내던 나 자신에 심한 부끄러움

길바닥에 서서 물색없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그래도 시간이 지나자 대열은 차츰차츰 짧아졌다. 대신 한 약국에 할당되는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던데 혹시 내 앞에서 물량이 끊기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생겨 자꾸 약국 안을 기웃거렸다. 근 40분이 지나 겨우 차례가 되어 안으로 들어가자 계산대 위의 물량은 거의 바닥을 드러냈고 운이 나쁜 건 아닌지 어쨌든 공적마스크 2장을 3000원과 맞바꿀 수 있었다. 그곳을 나와 길에 서서 손에 쥔 마스크를 내려다보는 심사는 몹시 씁쓸했다. 코로나19의 백신이나 특효약도 아닌 고작 예방적 차원인 마스크일 뿐인데 그것도 정해진 요일에다 또 약국마다 들쭉날쭉한 판매 시간에 맞춰 배급받듯 길거리에 줄을 서야 하는 한심한 처지가 서글펐다. 그나마 구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현실이니 더욱 그랬다.

무엇이든 배급받기 위해 기다리는 줄서기의 기억은 음울하다. 지난 5·16 군사정변 직후, 비록 한시적으로 운영되었지만 일명 ‘재건 우동’을 끓여 점심시간에 배급해 주던 구휼 제도가 있었다. 간혹 동네 반장이 나눠주는 배급표를 받아 양은 냄비를 들고 간이급식소 앞에 줄 서곤 했던 어린 시절이 아프게 상기되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땟거리를 벌기 위해 행상을 나가고 한 끼 점심을 기대하며 오도카니 앉아 있을 동생들을 생각하며 초조하게 차례를 기다리던 모습은 되도록이면 회상하기 싫은 지난 시절의 기억이다. 물론 그때 배급 제도는 절대 빈곤 속에 있던 서민들의 허기를 조금이나마 위무하려는 궁여지책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 경제 규모 11위권에 든 오늘의 한국이 마스크 하나 제대로 공급하지 못해 국민들을 길바닥에 줄 서게 하는 것은 무슨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당국의 무능이라는 생각이 들어 화도 났다.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혀 우울하게 서 있을 때 뒤에서 어떤 대화가 들렸다. 뒤돌아보니 내 또래의 노인 한 분이 다른 이에게 마스크를 한 장 건네고 있었고 상대 노인은 이를 극구 사양하며 나누는 이야기였다. “일주일에 두 장 갖곤 한참 모자랄 낀데 내한테 한 장 주면 우짤라고 그라능교. 마 뜻은 고맙지만 고마 넣어두이소.” 상황을 짐작해 보니 아마 약국에서 마지막으로 마스크를 산 사람이 바로 자기 뒤에 줄 섰던 이에게 미안했던지 서로 나눠 쓰자며 제의한 모양이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의 어떤 전율이 몸을 스쳤고 이어 줄서기에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며 어서 내 차례만 오길 기다리던 소인배로서의 부끄러움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그래, 부끄러웠다. 하루 수백 명씩 한꺼번에 발생하던 코로나19 확진 환자들을 감당하느라 거의 초주검이 된 대구의 병원과 방역 관계자들, 사선을 넘나드는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전국에서 모여든 의료진들의 고귀한 헌신적 활동들뿐만 아니었다. 누구는 전국 확산을 막기 위해 대구를 봉쇄해야 한다고 거품을 물었지만 정작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며 한 달이 지난 오늘까지 스스로를 자가 유폐시킨 대구 시민들의 위대한 역량을 떠올릴 때, 고작 마스크 2장에 보인 치졸한 분노와 행동은 분명 낯 뜨거운 일이었다. 그것도 소위 글을 쓴다는 작자가 말이다.

흑사병의 창궐로 인해 봉쇄된 도시 오랑에서 죽음과 절망이라는 엄혹한 운명과 대결하며 저항하는 인간들을 그린 카뮈의 <페스트>가 머릿속을 스쳤고,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문학은 그 골짜기를 기록한다. 그래서 작가의 사명은 역사의 골짜기에 묻혀 있는 수많은 인물을 문학의 이름으로 불러내는 일이다”고 말한 <산하>의 작가 이병주가 갑자기 떠올라 그 부끄럼을 더했다. 코로나19로 우리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는 이 위기 상황에서 두려움과 불안이 만연한 현실을 깊이 사유하고 기록하기는커녕 마스크 2장이 주는 안위에만 급급했던 나 자신을 심하게 탓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길에 서서 스스로 옹졸함을 자책하는 동안 진정한 베풂과 아름다운 사양을 주고받던 노인들은 건널목을 건너 서로 제 갈 길로 갔지만, 나는 신호등이 몇 번 바뀌어도 그 건널목을 한참 동안 건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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