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사회에 희생된 삶을 비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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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중견 소설가 동인 ‘사현금’ 소속 작가들이 편집회의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하기, 박향, 정인, 강동수 소설가. 호밀밭 제공

코로나19란 무형의 바이러스가 세상을 휘젓는 대혼돈의 시기다. 불안과 무기력, 현실적 두려움이 일상을 짓누른다. 이때 지역 중견 소설가들이 문학과 현실의 접점을 찾고 문학의 사회적 책무를 묻는 결실을 냈다.

‘사현금’ 무크지 ‘꽃 중에 꽃’ 발간
김하기·강동수·박향·정인 동인
문성수·배길남 소설도 게재

김하기, 강동수, 박향, 정인 등 지역 중견 소설가 4명의 동인으로 구성된 ‘사현금(四絃琴)’은 최근 부정기간행물인 무크지 2호 <꽃 중에 꽃>(사진·호밀밭)을 펴냈다. 이번 책에는 ‘사현금’ 소속 작가 4명의 작품은 물론 객원 필진인 문성수, 배길남 소설가의 작품이 실려 중량감을 더한다.

‘사현금’은 대한제국 때 현이 4개인 바이올린을 지칭하는 이름. 작가 4명은 2013년 소설 공부를 하려고 사현금을 결성했다. 매달 한 번씩 모여 자신의 창작품을 가져와 합평했다. 조언과 질책, 서로의 글쓰기에 자극을 받은 이들은 2017년 12월 무크지 1호 <두 여자를 품은 남자 이야기>를 펴낸 바 있다.

사현금 작가들은 무크지 2호 <꽃 중의 꽃>의 서문 ‘이 시대의 소설가로 살아가기’에서 비장감 넘치는 톤으로 말한다. “어쩌면 바이러스가 퍼진 세상에서 사람들이 할 일은 한 권의 소설책을 읽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자가 줄어든다고 독자를 원망할 수는 없다. 작가가 독자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독자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소설가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이번 책에도 ‘네 개의 현이 이뤄내는 다양성 속의 조화된 음률을 꿈꾼다’는 ‘사현금’의 지향점이 그대로 담겼다. 각자 뚜렷한 작품 세계와 개성을 바탕으로 다채로운 소설의 향연을 선보인다.

‘역사와 사회라는 거대한 파도에 찢긴 개인의 삶을 건져 올리는 것’이 이번 무크지를 관통하는 주제다. 표제작인 정인 작가의 ‘꽃 중에 꽃’의 주제가 이를 잘 드러낸다. 작품은 아름다운 꽃으로 살고 싶었지만,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상처 많은 삶을 살았던 할머니와 이 할머니를 지극히 사랑했던 할아버지의 가슴 아픈 이야기다. 김하기 작가의 ‘귀향’은 한국전쟁이란 비극적 역사의 소용돌이에 매몰돼 35년 만에 출옥한 비전향 장기수의 안타까운 삶을 보여 준다.

강동수 작가의 ‘비에이’는 아름답게 포장된 자신의 첫사랑 상대가 실은 고통스러운 삶의 터널을 통과했음을 뒤늦게 깨닫는 이야기다. 박향 작가의 ‘반말’은 언어가 가진 기능을 지나치게 맹신하며 늘 높임말을 쓰는 한 여성이 타인과 불화를 빚고, 깊고 고독한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는 이야기를 담았다.

문성수 작가의 ‘착각일수도’는 학교에서 성추행이란 괴소문에 시달려 사표를 냈지만, 아집의 그물에 사로잡힌 여고 교사의 이야기다. 배길남 작가의 ‘아버지가 가리킨 나라’는 자식들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처절한 위선을 담은 작품이다.

작품들을 보면 역사와 사회의 거친 파도가 개인에게 비극적 삶과 희생을 요구하는 지점이 많다. 이에 맞서 개인은 치열하게 생존하려고 하지만,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상처 입은 개인을 보듬어 주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작가들은 비극의 역사가 제3자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와 가까운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고 시대적 아픔이 타인의 아픔을 넘어 개인의 아픔으로 다가올 때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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