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적 상상력으로 쓴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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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프랑스 일리에콩브레에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작가 프루스트의 집 앞에 서 있는 함정임. 그는 “소설과 삶, 집과 세상을 되돌아보는 장면이다”라고 했다. 김태형 제공

“30년 전인 1990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광장으로 가는 길’을 쓸 때부터 디지털 노마드적인 문장, 문체, 기질이 녹아 있었던 것 같다. 등단 초기부터 파리, 도쿄 등 해외 도시를 무대로 썼는데 이는 당시 한국문학계에선 이례적이었다.”

함정임 등단 30주년 소설집
‘사랑을 사랑하는 것’ 출간
장소성 강한 ‘영도’ 등 10편
여행과 소설 쓰기 병행하며
애도와 사랑의 진실 찾아 나서

올해 등단 30주년을 맞은 함정임 소설가는 김영하, 김연수 소설가처럼 쓰기 위해 여행하고, 여행하기 위해 쓰는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여행하는 인간)’ 이미지가 강하다. 함정임은 그동안 아홉 권의 소설집, 네 권의 장편, 한 편의 중편소설과 10여 권의 세계문학예술기행집을 냈다.

그는 “세계문학예술 기행자로서 세계 소설 현장을 답사하고 한국 독자에게 매개하는 역할을 해 왔다. 문예지 연재 프로젝트로 해외 취재를 하러 가는 일이 많았다. 세계 공간을 가로지르는 여행은 세계 시민·작가로서 삶의 내역이나 마음의 지도를 서사화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우찬제 문학평론가는 “함정임 소설 삼십 년은 곧 소설 쓰기와 여행하기, 혹은 여행하며 소설 쓰기와 소설 쓰며 여행하기에 중독되었던 세월의 음표들”이라고 했다.

함정임이 아홉 번째 소설집 <사랑을 사랑하는 것>(문학동네)을 펴냈다. 2015년 <저녁식사가 끝난 뒤> 출간 이후 5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집. 함정임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특유의 유목민적 상상력을 발휘해 마음의 애도와 사랑의 진실을 찾는 글쓰기를 이어간다. 길 위에서, 심연에서 생의 빛과 그림자를 그린 단편 10편이 실렸다.

무엇보다 소설집 구성이 독특하다. ‘고원에서’라는 초단편을 ‘브릿지’(연결 작품)로 해서 앞쪽에는 ‘순간, 순간들’ ‘너무 가까이 있다’ ‘순정의 영역’ ‘스페인 여행’ 등 추모와 애도, 삶의 현장이 서사가 된 작품을 실었다. 뒤쪽에는 ‘해운대’ ‘디트로이트’ ‘몽소로’ ‘영도’ 등 장소가 주체가 되고 장소성을 매개로 한 작품을 배열했다.

‘순간, 순간들’과 ‘순정의 영역’은 월남 세대, 실향민들로 대표되는 이전 세대 이야기가 주축이다. 특히 ‘순정의 영역’은 삼계탕, 해주, 계단과 아이 등 키워드를 중심으로 개별 단락을 만들어 스토리를 풀어낸다. 스케치하듯 생동감 있는 특질을 포착해 콜라주처럼 보여 주는 독특한 글쓰기 기법이다.

함정임은 “개인적으로 ‘너무 가까이 있다’란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엔 거의 없고 일본에서 인구 절벽으로 최근 생긴 직업인 ‘빈집 관리사’가 주인공이다. 함정임은 치밀하게 자료를 조사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상상해 작품을 구현했다. 그는 “소설가란 사물과 사태 속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사람 마음을 여러 층위로 보는 전문가이자 샤먼”이라며 “우리 삶과 사회적 흐름의 최접점을 서사 작업화해 위로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었다”고 했다.

소설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도’는 작가 생활 30년을 한눈에 펼쳐 보이는 압축미가 돋보인다. 작품은 어처구니없는 사정으로 자살한 영도 출신의 아버지를 애도하느라 속수무책인 기주와 그의 친구 재인, 그 둘을 매개하는 포르투갈 파두 아티스트 조아나의 관계를 다뤘다. 작품에선 영도와 포르투갈 리스본이 교차해 나타난다.

“리스본이 혼란스럽지만, 황홀경을 가진 것처럼 영도의 역사성, 지리 지형적 특성, 신화성을 배면에 깔고 영도의 고유한 속성을 보여 주고 독자가 영도만의 아우라를 사랑하게 하고 싶었다.” 작가는 이처럼 소설집에서 부산의 장소성을 드러내는 데도 신경을 썼다. 이주 여성을 모티브로 한 단편 ‘해운대’의 원래 이름은 ‘꿈꾸는 소녀’였다.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인 그는 13년째 소설창작공동체 ‘미필담’을 이끌며 후학들의 연구와 창작열을 북돋우고 있다. ‘출판사와 함께하는 편집자 과정’도 열어 서울 창작자들과 후학들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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