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영 칼럼] ‘나이 많은 남자 엘리트’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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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고대 그리스 폴리스는 제비뽑기로 지도자를 정했다. 지금 시각에선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그 나름대로 이치에 닿는 방식이었다. 추첨 통은 후보자의 배경이나 신분, 화술, 지능을 고려하지 않으니까. 이는 한 집단의 현재나 갈 길을 정하는 데 있어 누구나 예외가 있어선 안 된다는 공동체 정신의 발로였다. 동력은 엘리트 정치의 폐해인 권력 독점을 어쨌든지 피해 보려는 헬라스인들의 자유 정신이었다. ‘국민을 바보로 하는 정치인’을 생리적으로 기피하는 주권 의식의 결과였다. 이 선출 방식은 다양한 의견을 정책 결정에 반영하려는 의지의 소산이기도 하다. 특정 계층이나 직업군, 연령층이 지나치게 각종 현안을 좌지우지하는 사회는 끝내 어지러워진다는 점을 고대인들도 간파했던 것이다.


막 오른 ‘4·15 총선’의 아침
민의 반영 국회 구성 의문에
투표소 가는 발길 무거워

특정 나이, 성별, 직업 편중
기형성 극복하는 선택 해야
시대 맞는 법률 제정 가능해


드디어 제21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4·15 총선’의 서막이 올랐다. 아직 발길은 투표장으로 향하기 이전이다. 이 상황에서 눈길이 먼저 이처럼 아득한 옛날 지중해로 향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그 연유를 찾으려 내면으로 들어가 보니 참정권 불신이라는 놈이 똬리를 단단히 틀고 있다. “나를 위한 대표는 국회에 없다”, “당신을 위한 대표는 국회에 없다”, “우리를 위한 대표는 없다”라는 소리도 마음의 동굴 벽을 따라 때리며 한데 엉겨 메아리처럼 울린다. 투표도 하기 전에 이런 낭패감이 드는 건 대한민국 국회의 기형적인 모습에 기인한다. 그동안 국회의원 구성은 우리나라 인구 구조와 완전히 따로 놀았다. 고질이어서 그 실상을 알아보려 여러 해를 살필 것도 없다. 제20대 국회만 봐도 그렇다.

우선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출신 직업이 국민의 다양한 삶을 반영하는지 알아보자. 우리나라 직업군은 250가지로 분류되는데 의원들의 직업군은 20가지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의원의 출신 직업이 몇 가지로 편중돼 있다는 말이 된다. 그중에도 의원 6명 가운데 1명이 법조인이라는 사실은 국회의 비정상을 여실히 드러낸다. 직업을 가진 인구 중 법조인 비중이 0.1%에 그치는 점을 고려하면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특정 직업이 과잉 대표되는 건 학자, 관료라고 다르지 않다. 반면 농림어업 축산업이나 기술 관련 종사자는 다수지만 국회 진출은 미미하다. 결국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다. 쏠림과 소외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연령에 있어 과다 대표성도 큰 문제로 지목된다. 인구 구성에 있어 30% 정도인 50, 60대가 국회의 80%를 웃돈다. 30대는 3명뿐이다. 이래서는 사회 변화상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여러 연령층의 요구도 수용할 수 없다. 성 착취물의 온상인 ‘n번방 ’사건 같은 디지털 범죄를 단죄하고 예방할 법규조차 제대로 없는 현실이 그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법안 제정도 마찬가지다. 성별 불균형의 심각성도 민의를 왜곡하는 경우이다. 인구의 절반이 여성인데 국회의 남녀 성비는 5대 1에 가깝다. 압도적인 남성 국회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국회상은 일그러진 거울에 비유할 수 있다.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비추지 못해서다. 어떤 때는 깨진 거울로 변해 멀쩡한 국민 얼굴을 흉측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에 대해 국민 선택의 결과라고 하겠지만, 그건 눈속임에 불과하다. 당장 현재 선거판을 보더라도 진상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돈 많고 유명한 후보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는 무대가 아닌가. 피선거권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 돼 버렸다. 어쩌면 투표권에도 불평등이란 오염 물질이 스며들었는지도 모른다. ‘참정권 평등’이란 말이 책 속에만 존재하는 죽은 가치로 여겨진다. 제비뽑기를 선택한 고대 폴리스의 놀라운 통찰력이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이 감탄과 실망의 교차는 ‘마우스 랜드’라는 우화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생쥐들이 그들의 대표로 고양이를 뽑아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얘기이다. 고양이는 생쥐를 위한다며 온갖 생색을 내고는 결국 자신을 위한 법을 만든다. 쥐들은 참다못해 투표를 통해 집권당을 바꾼다. 하나, 검은 고양이가 흰 고양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나라 국회로 고개를 돌려보자. “고양이가 생쥐들을 위해 일할 수 있을까”라는 문장을 “특권층이 서민을 위해 일할 수 있을까”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처지가 다르면 견해도 달라지는 법이다. 이를 보완하려 만든 연동형 비례대표제도 급류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자. ‘나이 많은 남자 엘리트’를 줄이는 게 급선무이다. 기표 도장을 찍을 때 그들을 골라 빼는 선택을 해보자. 먹을 게 빈약한 식당 메뉴판을 받아 든 심정이겠지만.

gap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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