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5년 시력(詩歷), 자꾸 가면 그것은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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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째 시집 <그녀는 내 그림 속에서 그녀의 그림을 그려요>를 낸 시인 김참. 부산일보DB

시인 김참 5번째 시집 <그녀는 내 그림 속에서 그녀의 그림을 그려요>. 부산일보DB
김참(47) 시인은 부산 시단, 나아가 한국 시단에서 광휘를 지닌 이름이다. 26세 때인 1999년 현대시동인상을 받으면서 혜성 같이 나타난 그는 ‘2000년대 한국 시단에 환상시 도래를 알리는 화려한 전조’(박대현 문학평론가)였다. 그런 그가 4년 만에 5번째 시집 <그녀는 내 그림 속에서 그녀의 그림을 그려요>(문학동네)를 냈다.

1995년 등단 이후 어느덧 25년 시력(詩歷). 그 시력을 증명하는 이번 시집은 ‘자꾸 가면 그것은 길이 된다’라는 명제로 집약된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그의 독특한 길을 새롭게 그려 내고 있다.

김참 시인, 4년 만에 5번째 시집
‘그녀는 내 그림 속에서…’ 출간
파편적 세계 나열 벗어난 서정 전략
“시에서 깊이·아름다움 추구할 것”

그가 취한 것은 파편적인 이 세계의 나열을 벗어난 ‘느낌 있는 서정 전략’이다. 그는 묘하면서도 아름다운 환상적인 서정시를 보여 준다. 가령 어두운 공원 한쪽에 고요히 백합이 피는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 울고 있으며 빵 굽는 냄새가 퍼지고 있고 누군가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서술로 이어지는 시 ‘백합’은 시인 서정주의 ‘국화 꽃 옆에서’를 떠올리게 한다. 백합이 피는 데 울음소리, 빵 굽는 냄새, 노랫소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그의 시에 많이 나오는 저수지는 고향 삼천포 죽림동의 어린 날 기억 속 저수지에 유래를 두고 있다. 저수지에 커다란 파문이 일어날 때 둑에 앉아 당신을 생각하는 나도 그 파문에 섞여 수면 위로 퍼져 나가는데 저수지의 파문과 ‘레코드판’의 홈이 같은 이미지로 겹쳐 읽히는 순간, 전율이 스친다(시 ‘저수지’). 그는 한 인터뷰에서 “시에서 더 깊이 있고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시가 아름다워진 것은 의미와 리듬을 반복적으로 구사하고 있어서다. 리듬은 체험과 세계를 질서화하는 것이다. 거기에 그가 많이 듣는 음악이 작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전에도 그의 시에는 음악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명시적으로,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있다.

시 ‘벌목’에서 나무가 베어져 쓰러지는 소리는 까마귀 소리, 개 짖는 소리의 연쇄적 반복으로 이어지는데 거기에 그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이 울음소리를 얹고 있다. 소리에 소리가, 울음에 울음이 겹치고 있다. 아이 울음소리는 숲에서 쓰러지는 나무의 아픈 울음소리처럼 울리고 있다. 그는 “소리와 이미지의 반복과 겹침은 시에 주술적이고 마술적인 힘을 부여한다”고 했다. 그것이 진동할 때 아름다운 파장이 생기는 것이다. 시의 아름다움은 지루하고 남루한 이 세계를 견딜 수 있게 하면서 꿰뚫는 것일 터이다. 그것이 그가 지향하는 시의 힘일 것이다.

물론 그가 보기에 이 세계의 실상은 여전히 어둡다. 그의 시에 따르면 우리는 ‘밖으로 나가려 해도 현관을 찾을 수 없거나 어쩌면 여기가 내 집이 아닌지도 모르는’(25쪽) 막다른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의 삶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뻔한 레퍼토리의 기괴한 서커스’(58쪽)일 따름이다.

그래서 그는 이 세계의 허점을 파고든다. 시 ‘유령의 세계’에서는 차라리 ‘검은 옷을 입은 텅 빈 육체, (...) 햇살 아래 드러나는 텅 빈 육체들, 유령들이란 그런 것’이라고 쓰고 있다. 유령은 애달프게 죽은 원혼이 아니라 살아 있으나, 표정 없는 우리 삶이라는 것이다.

그는 표정 없는 이 세계와 삶에 틈을 벌리기 위해 상징 언어로서 꿈의 욕망이 아니라 꿈의 문법, 꿈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는 “우리 삶을 이루는 것은 꿈과 현실, 둘뿐이다. 꿈과 현실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기야 양자역학이란 것도 인간 경험치를 훨씬 넘어선 물리 세계의 깊숙한 실상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꿈의 상징 언어는 일상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날 것을 포착하고 언어 너머를 두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 시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던 것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시는 어려움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참신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이가 시인을 자처하며 시를 쓰고 있으며 시 아닌 시들이 너무 많이 남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 그는 서정 전략으로 힘 조절을 하면서 환상의 언어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 속에 그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그의 시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를 느낄 것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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