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호 칼럼] 지고도 이기는 법, 혹은 그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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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논설위원

4·15총선이 있던 날 근무를 마치고 자정 무렵이 되어서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님도 개표 방송을 보던 중이라 자연스럽게 선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연하게도 우리는 서로가 가장 관심을 가진 후보가 일치했다. 이야기할수록 뭔가 미심쩍어지긴 했다. 안타깝게도 기사님은 그 후보가 반드시 당선되길 바라고, 나는 그가 꼭 떨어지길 기도한다는 취향의 차이가 있었다. 나는 그의 ‘막말’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데, 기사님은 그의 말이 ‘사이다’ 같다고 했다. 밤은 깊었고 집에는 가야지 뭐 어쩌겠는가….

이번 총선은 전국적으로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대구·경북과 부산·울산·경남에서는 야당인 미래통합당의 압승으로 끝이 났다. 여권은 ‘정국 주도권’이라는 뼈를 취했지만, 부·울·경에서 내준 살점이 아팠을 것이다. 지역의 통합당 당선자들은 기뻐도 웃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선거 결과가 나온 직후부터 SNS에는 전국 분위기와 다른 선택을 한 부산 시민을 원망하는 글이 많이 올라온다. 지역구도가 되살아났다거나, PK가 보수로 회귀했다는 섣부른 해석도 나온다. 민심은 무서웠다. 지금은 민심이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인지 냉철하게 분석하고, 앞으로 각 당이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총선 결과 부·울·경 ‘지역구도’ 뚜렷?
정당 득표율상 진보·보수 격전지화

여당 부산 참패는 시정 변화 없고
신공항 문제 해결 약속 못 지킨 탓

야당, 부산 현안 사업에 힘 합치고
초거대 여당, 독선 함정 경계해야

통합당은 부·울·경 전체 40석 가운데 32석, 무소속 김태호 당선인을 포함하면 82.5%나 차지했으니 압승으로 보인다. 하지만 속내는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부산의 지역별 정당 득표율은 더불어시민당 28.4%, 정의당 7.3%, 열린민주당 4.6%로 범진보 세력(40.3%)은 미래한국당(43.7%)과 어금버금하다. 이 정도 정당 지지율이면 PK가 보수로 회귀했다고는 볼 수 없다. 부산 18개 지역구에서 민주당 후보의 득표율은 평균 44.3%로 20대 총선 당시 평균 득표율 39.0%에 비해 5%포인트 이상 높아진 사실도 그렇다.

부산에서 5~6%대 차이로 승패가 갈린 곳이 8곳이나 된다. 이제 부산은 특정 정당의 싹쓸이가 통하지 않는, 진보와 보수의 격전지로 봐야 타당하다. 부산 지역 통합당 압승의 이유는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부산 총선 참패는 지난번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에 지방 권력을 몰아주며 기회를 줬지만, 시민이 체감할 만한 큰 변화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민주당은 지난 총선 때 부산에서 5석을 주면 신공항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부산 시민은 약속을 지켰고, 심지어 힘을 내라고 재보선에서 1석을 보태주기까지 했다. 4년이 지났지만 신공항 건설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이 막판까지 신공항을 모른 척하고 뭉개고 있었으니 정신 차리라고 매를 들어야 맞지 않는가.

양당의 승부는 장수들의 기 싸움에서 일찌감치 갈렸다. 민주당의 김영춘, 김두관, 김부겸과 통합당의 황교안, 홍준표, 김태호의 임전 태세는 많이 달랐다. 김두관은 쉽게 당선될 김포갑을 포기하고 양산을 후보로 기꺼이 나선 뒤 승리해 잠룡의 체급을 올렸다. 장관 재임 시절 지역민을 챙기지 못한 점이 아쉬웠던 김영춘과 김부겸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은 지역구도라는 벽에 균열을 내어 민주당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사람들의 미안한 마음은 정치적 자산으로 축적되었다.

황교안 대표가 등 떠밀려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종로에 일찌감치 갔다면, 결과는 같아도 적어도 해석은 달라졌을 것이다. 황 대표가 지난해 창원성산 보궐선거에 과감하게 도전했다면 재선의 국회의원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홍준표와 김태호는 우여곡절 끝에 영남에서 무소속으로 살아남았지만 수도권 험지 출마를 거부했다는 멍에를 쓰게 됐다. 김무성의 호남 출마 의지는 박수를 칠 일이었다. 통합당에는 지역구도라는 벽에 몸을 던지며, 큰 꿈을 꾸는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이길 법한 싸움만 하려니 자꾸 지는 게 아닌가 싶다. 시작부터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자민련 명예총재 시절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 “정치라는 게 지고도 이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야당이 매일 여당을 이기려고 덤비기만 하면 곤란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남 자민련’ 소리를 듣는 통합당은 이 말을 새겨야겠다. 또다시 미래한국당의 위성 교섭단체 구성이라는 꼼수를 쓴다면 미래가 뻔하다. 부산에서 민주당의 패배는 동남권 신공항 등 부산 현안사업 추진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지역의 미래와 먹고사는 문제 해결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야당도 이전에 뭐라고 했든, 지금은 동남권 신공항에 힘을 합치는 게 이기는 길이다. 초거대 여당은 앞날에 어른거리는 ‘이기고도 지는’ 함정을 경계할 일이다. 이번 총선에서 거의 다 떨어진 막말 정치인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한다. 막말 정치 굿 바이!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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