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마이너스 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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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원유 시장은 경제 법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다른 분야 역시 수요와 공급선의 일치와 어긋남을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니지만, 유가는 그 정도가 유달리 심하다. 강대국 간의 패권 경쟁이나 국가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히면서 정치와 사회적 영향력이 기름값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일어난 중동 전쟁도 마찬가지다. 이 분쟁이 원인과 결과가 되어 파동이 생기면서 세계 경제가 심하게 흔들리곤 했다.

어떤 때는 결제 수단을 놓고 군사 개입이 이뤄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미국이 달러가 아닌 다른 통화로 이뤄지는 석유 거래를 좌시하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아메리카 슈퍼 파워’의 원천인 기축 통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실력 행사라는 뜻이다. 복잡한 중동의 종교와 민족도 석윳값을 오르내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이 물질의 가치가 높기에 생겼다. 오일은 한 나라의 경제와 안보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에너지 원이다. 그래서 유전 확보와 세계 패권이 같은 의미로 통한다. 하지만 아무리 큰 난리가 나도 원유 가격이 마이너스 영역으로 들어간 적은 없다. 한 방울도 아쉬운 기름을 돈 받고 가져간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당장에 석유가 없다면, 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하고 만다. 수많은 공장도 숨이 끊어진 동물 사체처럼 금방 부패해질 것이다.

이처럼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폭락장이 벌어지고 말았다.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상업거래소에서 5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가 장중 최저치 -40.32달러까지 떨어졌다. 40달러를 준대도 살 사람이 없는 기이한 일이 생긴 것이다. 돈 주고도 못 살 석유를 “돈 줄 테니 가져가라”는 말을 듣는 세상이 도래한 셈이다. 선물투자자들이 6월물로 갈아타는 ‘롤오버’를 선택하면서 가격 왜곡이 생긴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래도 사상 초유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재고가 넘쳐나고 저장 시설이 부족해 누구도 원유를 가져갈 수 없는 상황도 부인할 수 없다.

모두 코로나19가 만들어 낸 환경이다. 세계 경제 마비로 기름 수요가 급감해 형성됐다. 과거에 석유 전쟁을 일으킨 초강대국들이 휘청거리고 있다. 미국 셰일 업계도 줄도산 위기에 처했다. 어떠한 무기가 이런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을까. 바이러스 창궐이 인간을 향한 지구의 보복일지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한다. 지나친 탐욕이 공룡 멸종의 원인이라는 학설이 새삼 떠오른다.

이준영 논설위원 gap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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