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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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덕 소설가

아무런 정보 없이 첫 회 드라마를 시청한 건 배우 효과 때문이었다. 김희애가 출연한다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영화 ‘허스토리’와 ‘윤희에게’모두 최근에 김희애가 선택한 작품들이었고, 오래전에 방영된 불륜 드라마 ‘밀회’에서도 그녀는 상류 계층의 위선을 까발리며 여배우로서의 존재감을 여지없이 각인시켰다.

TV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19금 치정극에 심리 스릴러를 버무려 빠른 속도로 휘몰아치며 서사를 전개시켰다. 무엇보다도 인간 존재의 욕망과 복잡성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방식이 안방 드라마로서는 새로웠다. 그런데 소위 ‘맞바람’ 장면을 보면서 한국적 대중 정서를 너무 앞지르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생겼다.

BBC드라마 원작인 ‘부부의 세계’
인간 욕망 거침없이 그려내 관심

목적 위해 수단 정당화하는 인물들
인간관계의 복잡성도 잘 보여줘

무엇으로 사는가, 다시 묻게 돼
사랑 이후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그제야 검색해 보니 영국 BBC 드라마 ‘닥터 포스터’가 원작이었다. 원작자인 마이크 바틀렛은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에서 영감을 받아 글을 썼단다. 이미 연극으로 무대에 올린 바 있고, 각색된 TV드라마는 영국인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2015년 5회(시즌1)에 이어서 2017년에 5회(시즌2)가 방영되었고, 시즌3 방영까지 앞두고 있다.

지금까지 전개된 ‘부부의 세계’는 원작 드라마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립글로스에 이어서 머리칼 한 올이 계기가 되어 남편의 불륜이 밝혀지고, 치밀한 계획 하에 도시에서 내?i았던 남편은 뜻밖에 성공해서 화려하게 컴백했다. 더구나 불륜의 대상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서 이번에는 역으로 여주인공의 삶을 위협하는 반격에 나서고 있다.

자신이 몸담고 살아온 세계가 모두 가짜였다는 깨달음은 여주인공을 가격한 일생일대의 치명타였다. 왜 안 그러겠는가. 친구를 포함한 주변 이웃 모두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와 허무로 다가왔을 것이다.

세계의 거짓에 눈뜬 여성은 어떤 방식으로 ‘이후의 세계’를 살아내는가. 그동안 비슷한 상황에 처한 한국 드라마의 수많은 ‘여주’들은 시청자의 보호 본능을 자극해서 동정심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부부의 세계’의 지선우는 오히려 시청자를 설득시키며 당당하게 행위를 주도하고 있다. 여주인공의 분노 자체에 집중한 영국의 원작과는 달리,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집요하게 보여주는 연출도 인상적이다.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선과 악으로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입체적 인물들이다. 주인공인 지선우조차 복수를 위해서 의사로서의 윤리 의식을 잠시나마 팽개친다.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젊은 여성 민현서(심은우)는 지선우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지선우의 친구이자 동료 의사인 설명숙(채국희)의 교활한 이중성은 현실 속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입체적 인물의 정점을 찍는 이는 바로 다름 아닌 남편 이태오(박해준)이다. 아내와 애인 모두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바 있는 그는 전처를 향한 애증을 거둬들이지 못하고 그녀의 동료 의사 김윤기(이무생)에게 폭발적인 질투심을 느낀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건 주인공들의 공통된 특징인 듯하다. 인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선의와 선량함을 보여주는 김윤기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욕망과 악다구니가 들끓는 이 정염의 드라마를 시청한 후에는 이상하게도 단순명료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같은 제목의 단편소설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대답한 바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걱정과 보살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의 마음에 있는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이 떠난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여주인공 지선우의 선택들이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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