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현의 사람 사는 경제] 성찰의 시간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

지난달 경기도 성남의 코이카 연수센터에서 2주간의 격리 생활을 마친 이란 재외국민들이 퇴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흑사병이 창궐하던 피렌체에서 10인의 귀족 남녀가 역병을 피해 수도원에 모인다. 요즘 말로 하자면 단체로 자가격리에 들어간 셈이다. 수도원 생활에 지루해진 남녀는 돌아가며 자신이 겪은 재미있는 경험들을 이야기하기로 한다. 선남선녀들이다 보니 처음에는 서로 눈치를 보며 점잖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지만, 이내 싫증이 난 일행들은 일탈과 쾌락의 경험담들을 솔직히 내놓기로 한다.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신부와 수녀들, 귀족과 귀부인들, 양가집 규수와 부유한 상인들이 불륜과 방탕을 즐기는 이야기들인데, 차마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기 민망할 정도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작가인 조반니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Decameron)> 이야기다. <데카메론>은 흔히 근대 서사문학의 효시로 불린다. 이전에는 영웅들의 이야기나 기사들의 모험담도 운문 형식으로 쓰이거나 낭독되었다. <데카메론>은 서양의 문학사에서 요즘 우리가 소설이라고 부르는 서사 형식으로 쓰인 첫 작품이다. 그런데 <데카메론>을 근대 소설문학의 효시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 형식의 독창성만이 아니라 더 큰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작품 속에 담긴 근대 정신이다.

코로나19로 삶의 모습 극명히 갈려
부자, 안전하고 호화롭게 격리생활
빈곤층, 감염 위험에 생계 걱정까지

피로감에 날선 혐오·원망의 말 난무
그럴수록 상식과 균형감 유지해야
지금의 비극 성찰 시간으로 삼아야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부자와 빈자, 계층마다 다른 삶의 모습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다. 부자들은 안전한 별장에서 호화로운 격리생활을 누리는 반면에 많은 노동자들은 감염 위협에도 생계를 위해 출근해야 한다. 더 많은 노동자들은 아예 일자리를 잃고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가게 문을 닫는 영세 자영업자들의 처지도 그리 다르지 않다. 학교와 돌봄시설들이 문을 닫으면서 저소득 계층의 아이들은 아무런 대책 없이 가정에 방치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데카메론>의 등장인물들은 별장에서 호화로운 격리 생활을 즐기는 요즘 부자들과 똑같은 인물들이다. 거리에서 가난한 이들이 역병으로 죽어갈 때 이들은 수도원에 들어가 부족한 것 없는 생활을 누리며 음담패설이나 즐기는 특권계급일 뿐이다. 그런데 <데카메론>의 서문에서 보카치오는 “불행한 사람들의 고뇌를 덜어 주기 위하여 이 책을 쓴다”고 말한다. 작품의 전개를 위해 귀족 남녀들을 등장시켰을 뿐 자신의 의도는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데카메론>이 발표된 14세기 중반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운동이 막 시작되던 때다. 잘 알다시피 르네상스는 중세로부터 근대로의 이행을 연 문화운동이다. <데카메론>은 단순히 성과 쾌락에 관한 저속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때까지 없었던 중세사회의 질서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이자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었다. 보카치오는 소설의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의 입을 빌려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한다. 작품의 다른 등장인물은 또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힘이 닿는 한 생명을 보존할 자연의 권리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여러 가지로 피로함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다.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상식적이고 균형된 사고와 판단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령 인터넷에서는 특정 국가에 대한 혐오의 표현이나 해외로부터 입국하는 이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원망의 말들을 쉽게 본다. 여당을 지지하는 어느 시인이 코로나19와 지난 총선의 결과를 묶어 특정 지역을 비난한 일도 있다. 다른 분도 아니고 모든 생명에 대한 공감을 이야기해야 할 시인이 그렇게 험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데 깜짝 놀랐다. 코로나19는 비극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비극의 기간을 더 인간적이고 더 배려와 존중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성찰의 시간으로 삼는 일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