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여성, 오거돈 그리고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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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익 디지털콘텐츠팀장

미국 연수 시절 친하게 지낸 인도인 가족이 있었다. IT업계에 종사하는 아버지와 아내, 두 딸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정이었다. 지난해 그들을 다시 만났을 때, 그 아버지가 의미심장한 말을 내게 했다.

“제 몸은 힘들지만, 아이들을 고국에서 키우고 싶진 않아요. 인도에서 아이들이 겪게 될 상황을 생각하면 끔찍할 정도입니다. 여성이 무엇이든 꿈꿀 수 있는 미국에서 아이들이 클 수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코로나19 위기 속 빛난 여성 리더십
국내외서 여성 리더 역량 집중 조명
국제도시 부산, 여전한 ‘마초 도시’
미래 위해 양성평등 가치 꽃피워야

이 장면이 갑자기 떠오른 것은 코로나19에 대처하는 여성 리더들 때문이었다. 코로나19 쓰나미가 세계를 휩쓸면서, 나라마다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사망자 수 등 피해 규모가 극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그런데 방어에 성공했다는 국가를 보면 여성 지도자가 이끈 경우가 많았다. 메르켈 독일 총리부터, 아던 뉴질랜드 총리, 솔베르크 노르웨이 총리, 야콥스도티르 아이슬란드 총리, 마린 핀란드 총리, 프레더릭센 덴마크 총리에다 대만 차이잉원 총통까지. 코로나19와 맞선 여성 지도자들이 보여준 결단력과 행동은 그들이 남성 지도자에 비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국가를 이끌 수 있는지 보여줬다. 당차면서도 현실적인 여성 리더들의 화법, 국민 생명과 안전을 향한 모성애 가득한 태도 등이 신뢰감을 줘 위기 극복에 큰 효과를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0년생 3년차 아던이든, 1954년생 15년차 메르켈이든 경력과 나이에 상관 없이 남성 지도자와 차별화된 그들의 위기 대응 역량은 연구 대상이 될 정도다.

국내로 눈을 돌리면, BBC 등 해외 매체와 인터뷰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 차분하게 방역을 지휘한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 등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국내외 유튜버들은 “저 사람이 우리 장관이면 좋겠다”고 자국의 코로나19 대처를 성토하는 반응을 전하느라 열을 올리기도 했다.

반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같은 일부 남성 리더들은 자의적인 판단으로 초기에 코로나19를 과소 평가하고, 이해관계에 따른 아집으로 늘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믿을 놈 하나 없다’, ‘다 똑같은 놈들이다’ 비난하면서도 우린 매번 고민 끝에 한 표를 행사한다. 국가, 지역 사회의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삶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테다.

부산을 돌아본다. 딱히 ‘여성 리더십’을 논할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아가 부산을 국제적인 도시로 바꾸겠다고 공언하며 당당히 시청에 입성했던 오거돈 전 부산시장은 성추행을 인정하며 물러나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당 소속 시장으로서 남성 지상주의를 타파하고 양성평등과 여성 리더십을 북돋워야 할 그가 오히려 출발선 뒤로 부산을 끌어당겨 버렸다. 그의 충격적 ‘탈선’은 그래서 최악이다.

고위 공무원 ‘오거돈’의 모습은 안상영 전 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2004년 6월에 있었던 재보궐선거에서 또렷하게 시민들에게 각인됐다. 당시 허남식, 오거돈 두 후보의 다른 리더십이 꽤나 회자됐다. 선거에선 패했지만 열린우리당 후보였던 오 전 부산시장 권한대행은 통 큰 리더십, 뚝심, 친화력이 장점이라는 세평이 많았다. 그렇게 쌓은 ‘공든 탑’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지난 총선에서 부산에선 처음으로 두 명의 지역구 여성 국회의원이 탄생하면서 그나마 희망을 엿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최초의 40대 여성 부산시의회 수장이란 수식어가 붙은 박인영 의장이 지난 지방선거 직후 새바람을 일으킨 데 이어 부산에서 제대로 여성 리더십을 보여줄 기회가 온 셈이다.

그래서 김미애, 황보승희 두 당선자의 어깨는 꽤나 무겁다. 김 당선자는 “부산의 리더 중 누구도 의지를 갖고 여성을 키우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제가 좋은 모델이 되고, 잘 한다는 소리도 들어야 하니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두 당선자는 이제 부산에서도 정·관계뿐 아니라 시민단체 등 사회 전 분야에서 실질적으로 일하는 여성의 모습이 부각되도록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전했다.

상징적인 여성 리더의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성의 지위와 역량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 역시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지금까지 부산에선 ‘자리’만 욕심내는 여성이 선택을 받은 경우가 많았고, 조직 속에서 여성 스스로 자신을 검열하거나, 남성의 생각과 유사하게 맞춰가는 면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산의 딸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뭔가를 주저하고, 그런 분위기 때문에 부산을 떠나려고 한다면 부산의 미래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r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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