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한의 분권 이야기] 21대 국회와 국가비상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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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소속 자치분권위원회 부위원장 경상대 교수

오월 말이면 20대 국회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21대 국회가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게 된다. 자치분권과 균형발전 측면에서 보면 20대 국회는 마지막까지 국민과 주민이 위임한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어제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 소위는 32년 만에 정부가 발의한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안 처리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아날로그 시대인 1988년에 개정된 지방자치법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시대에 걸맞게 법이 개정되지 않아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상호협력, 주민주권 강화, 지방정부 자치권 확대, 지방의회 전문성 향상, 대도시 특례화 등의 핵심 사항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충돌로 빨간 불빛만 튀기고 있다. 이러한 오작동의 해결은 21대 국회의 긴급 과제가 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고르게 발전하는 지역’이라는 국정 지표 아래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3년 동안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평등·불공정·불균형’이라는 ‘3불 격차’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수도권의 인구는 작년 9월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50%를 넘어섰다. 이는 지구상에서 유례가 없는 수도권 초집중화 현상이다. 수도권은 거대한 빨대가 되어 지역의 정치·경제·사회·교육·문화 등의 전 분야를 쉴 틈 없이 빨아들이고 있다.

정부 발의 자치법 처리 무산
20대 국회, 균형발전 외면해
주민 위임 과제 못하고 퇴장

중앙과 지방 차별 없애야
나라 살린다는 인식이 낳은
佛·日 극약 처방 도입 절실

서울을 중심으로 동·서·남으로만 뻗어있는 KTX 철도망은 국가의 인적·경제적 활동을 수도권에 집중시키고 있다. 부산 지역 환자의 수도권 유출 규모는 연간 60만 명에 이르며, 그에 따른 진료비도 6000억 원이 넘고 있다. 광주·전남에서도 한 해 40만 명의 환자가 수도권 원정으로 4000억 원 가까이 진료비를 사용한다.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환자의 수도권 유출은 타지역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실정이다. 수도권으로의 환자 쏠림은 KTX를 정점으로 한 수도권 빨대 효과의 일례에 불과하다. 지역의 의료서비스와 의료전달체계가 붕괴될 정도이니 지역의 경제, 교육, 문화, 사회 분야도 고사 위기에 놓여 있다. 이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불평등·불공정·불균형의 3불 격차는 과히 ‘국가비상사태’와 ‘긴급조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2014년 7월 일본의 전국 47개 광역자치단체장은 ‘소자화(小子化)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국가 차원의 인구 소멸과 인구의 도쿄 집중에 대한 강력한 대책을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에 촉구했다. 일본의 광역자치단체장들은 인구의 도쿄 집중을 국가비상사태라고 진단한 것이다. 이에 아베 내각은 지방창생(地方創生) 정책을 마련하여 이를 전담할 기구로 ‘마을·사람·일 창생 본부’를 설립하고, 담당 대신을 임명하였다. 지방창생 정책은 국가 개조 전략의 일환으로 로컬 아베노믹스로 불리고 있다. 일본의 지방창생 정책은 지역의 인구 감소와 도쿄 집중을 해소하려는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긴급조치였다.

프랑스는 이미 30년 전에 저출산을 국가 위기로 인식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바 있다. 프랑스는 출산 문제와 함께 1980년 이후 본격적으로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을 국가 주요 정책으로 추진하여 왔다. 1982년에는 지방분권법을 제정하고, 2003년 개헌을 통해 헌법 제1조 제1항에 프랑스의 지방분권화를 명문화하였다. 균형발전 측면에서는 1963년에 국토지역정비청(DATAR)을 설립하여 파리와 지방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국가 재정비를 시도하였다. DATAR는 2014년에 국가 균형을 위해 만들어진 세 기관을 합쳐 ‘국토 평등을 위한 위원회’(CGET)로 재편되었다. CGET는 국가균형정책을 시행할 때,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과 함께 하는 자치분권을 병행하고 있다. ‘프랑스는 지방 분권화된 조직을 갖는다’라는 헌법 제1조 제1항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지방은 깊어가는 지역 격차에 대해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러다 못해 이제는 지쳐 혼수상태에 빠진 형국이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지역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일본과 같이 극약 처방이 필요하다.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긴급조치 명령’ 수준과 같은 특단의 조치가 요구된다. 이를 위해 자치분권과 균형발전의 강력한 의지를 담는 ‘균형과 분권’형 개헌도 절박하다. 헌법 제1조 제3항에 ‘대한민국은 자치분권과 균형발전 국가를 지향한다’는 조문을 신설하고, 구체적인 사안을 각종 법률에 반영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와 21대 국회는 수도권 초집중화 현상이 야기하는 국가비상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긴급조치의 운명공동체이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2017년 새해에 제시하였던 대한민국의 재조산하(再造山河)가 시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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