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1등에만 몰아주며 굳세게도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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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 경제부장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네. 너희 지역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아직도 정신 못차리는 거야.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되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거 아냐. 너희 지역 사람들이 당만 보고 덮어놓고 찍어대는 통에 너희 지역은 발전이 안 되는 거야.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노. 이 지역에선 꾸준히 민주당 성향의 표가 30% 정도 나왔고 이번에는 40%를 넘었는데. 이 동네 선거 결과를 갖고 지역주의 재현이니 뭐니 그라지 마라. 1등 독식 룰을 놔두고 그딴 소리 하는 거 아이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지난달 무사하게, 극적인 결과로 막을 내린 총선 직후 서울지역 지인과 나눈 얘기들이다.

부산 총선 결과가 지역주의 재현?
민주당 지지가 40%를 넘었는데도
1등 독식 룰 때문에 결과 왜곡돼

사회적 가치 반영 못하는 1등 독식
수도권 몰아주기로도 모습 드러내

국회 의석 싹쓸이 수준 확보한 정권
1등 독식 깨는 룰 만들지 지켜봐야


총선 직후 상당수 언론들이 기자의 지인처럼 지역주의 재현을 들먹이며 부산지역의 선거 행태를 비판하고 나섰다. 늘 서울만큼은 아니더라도 다양한 비율의 표들이 쏟아지는 내 고장 부산지역 선거를 흥미롭게 지켜봐 온 입장에선 속이 이만저만 상하는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지인에게 항변한 내용처럼 내 고장 표심이 한 데 몰린 게 아니라 1등 독식 룰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한때 인구에 회자됐던 구호가 있었다. ‘아빠는 박찬종, 엄마는 김정길’이라는 구호다. 1985년 당시 민주한국당 후보로 부산 중·동·영도구 총선에 나섰던 김정길 후보가 유권자들에게 신한민주당 박찬종 후보를 찍으면서 자신도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며 외친 구호다. 구호의 주인공 김정길 후보는 박찬종 후보에게 절대 열세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결국 최다 득표로 당선이 됐다. 물론 박찬종 후보도 2등을 하고 당선증을 받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선을 위해 상대를 음해하기 바쁜 선거를 봐 온 요즘 세대들에겐 낯선 풍경이겠지만 이 같은 풍경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국회의원 선거가 중선거구 룰로 실시됐기 때문이다. 한 선거구에서 다수의 당선자를 배출하는 중선거구는 1등만 당선되는 현재의 소선거구와는 달리 표심을 비교적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기자는 믿는다. 만약 이번 부산지역 총선이 중선거구로 실시됐다면 국회의원 당선자 여야 비율이 표심과 거의 일치하는 4 대 6 정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 1등만 당선이 가능한 소선거구 룰을 적용하다 보니 표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졌다.

더욱 아쉬운 것은 선거개혁 과정에서 비례대표제에만 모든 이슈가 집중돼 정의당 등 군소정당이 거대 양당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중선거구에 방점을 두고 선거개혁을 추진했더라면 거대 양당이 독식하는 지금의 선거결과와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이번 선거를 겪으며 비례대표제 폐해의 극단을 본 것 같아 두고두고 더욱 아쉬울 듯하다. 만신창이가 된 비례대표제를 손볼 수밖에 없다면 소선거구를 중선거구 룰로 바꾸는 방안을 놓고도 진지한 논의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달포 전 끝난 선거 얘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은 근대사를 관통해 온 1등 독식이 선거 뿐만이 아니라 효율이란 명목으로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6·25전쟁 직후 전세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 언저리까지 성장하기 위해서는 1등 독식이 가장 효율적이었을 터이다. 한 가정에서도 가장 공부 잘 하는 자식에게 모든 걸 몰아주었던 과거를 떠올린다면 우리 사회가 1등 독식에 익숙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런 1등 독식은 대기업이 골목상권까지 침해하거나 수도권이 지역에 배분돼야 마땅한 예산과 인력을 독점하는 결과로 곧잘 이어진다.

그나마 대기업은 상생경제라는 제어장치가 최근 들어 작동하기 시작했지만 수도권은 지역분권이라는 제어장치 없이 무한질주를 하고 있는 상태다. 잊을 만하면 모습을 드러내는 수도권 공장총량제 완화 얘기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경제 부흥을 빌미로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해외 공장이 수도권으로 돌아오면 온갖 자금과 보조금, 세금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며 나온 얘기다. 수도권 이외 지역의 궤멸적 타격은 안중에도 없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는 언급하기에도 지친 동남권 신공항 문제가 20년 동안 허공에 떠 있는 동안 인천공항엔 수조 원을 들여 활주로를 하나 더 늘리겠다고 정부가 공공연히 언급하고 있다.

선거에서건 경제에서건 사회적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은 룰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서다. 수도권 독식이 공공연히 일어나는 것도 지역분권 룰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서다. 국회 의석을 싹쓸이하다시피 한 현 정권은 개헌 이외에 모든 게 독자적으로 가능하다. 사회적 가치가 1등에만 몰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룰을 만들지 지켜볼 때다.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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