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익의 참살이 인문학] 나는 몸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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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치의학전문대학원 교수

나이가 들면 삶의 태도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쌓아 온 삶의 경험이 ‘나’라는 생명을 조금씩 바꾸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의 나와 수십 년 전의 나는 같은 존재지만 또한 전혀 다른 실존이기도 하다. 젊은 나는 열린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채워져 있지만 늙어 가는 나는 닫혀 가는 삶을 바라보며 살아온 삶을 이야기한다. 젊은 나는 미래를 살지만 늙은 나는 과거를 산다. 그 미래와 과거는 모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 이야기는 내 몸에 새겨져 있지만, 나는 매 순간 필요에 따라 필요한 부분을 고쳐 써서 다른 이야기를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타고난 그리고 살아가는 몸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 내가 쓰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의 나, 같으면서 다른 존재
경험과 기억은 실타래 같은 몸의 실존
나는 곧 몸의 지혜이고 몸은 바로 나!

자판 앞에만 앉으면 떠오르는 것이 주로 옛이야기인 걸 보니 나도 많이 늙었나 보다. 대학 신입생 때니까 벌써 44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자전거로 국토를 종주했던 경험은 때마다 다른 방향에서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오늘은 엉덩이에 관한 이야기다. 하루에 100km, 포장도 안 된 길을 달리다 보면 체력 소모가 많은 건 당연하다. 지금이라면 감당하기 어렵겠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즐길 만한 부담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엉덩이에 반복적으로 가해지는 자전거 안장의 마찰력과 체중의 압력은 피할 수 없었고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우리는 목욕탕에서 빨갛게 충혈된 서로의 엉덩이를 보며 깔깔대고 웃곤 했다.

40여 년이 지난 뒤 옛 추억을 더듬어 재시도한 국토 종주의 경험은 그때와 많이 달랐다. 우선 잘 포장된 자전거 전용 도로가 생겨 돌부리에 걸리거나 자전거가 망가지는 일이 없었다. 주변 환경도 잘 정돈되었고 숙소 등 시설도 무척 깨끗하고 편리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할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한 일이다. 나이를 핑계로 힘을 보태줄 전기 모터까지 달았으니 그게 무슨 자전거냐고 핀잔을 들을 만도 하다. 자전거 여행이라는 이름은 같았지만, 경험의 내용은 크게 달랐다. 나도 그때의 내가 아니고 길도 달랐으며 그 위를 달리는 자전거도 달랐으니 당연한 일이다.

폭우를 핑계로 계획의 절반쯤에서 중단한 여행에서 40여 년 전과 뚜렷이 다르게 기억되는 건 엉덩이의 통증이었다. 이게 정말로 감각의 차이인지 그렇게 기억이 조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객관적으로는 훨씬 편안했어야만 할 최근의 여행에서 기억되는 통증이 오히려 더 심했던 것이다. 빨갛게 충혈된 친구의 엉덩이가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당시에도 통증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포장된 자전거 여행 이야기에서 엉덩이 통증쯤은 무시해도 좋을 또는 무시해야만 할 경험이었을 것이다. 최근 인지과학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기억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니 억지 해석은 아닐 것이다.

교묘하게도 우리 몸은 반복된 자극에 의한 통증을 피하는 법을 체득하기도 한다. 국토종주를 준비하면서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자전거 안장에 앉았을 때는 정말로 참기 어려웠던 통증이 한 달쯤 지나자 견딜 만해진 것이다. 통증에 둔감해진 것이 아니라 내 몸의 근육들이 지나친 자극을 받는 자세를 피하도록 적응한 때문이다. 이건 의식의 명령에 따른 것일 수 없다. 통증의 경험은 기억 속에서 만들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몸이 알아서 피하고 조절하기도 하는 것이다. 통증을 유발하는 자극은 실재하고 그것에 대한 경험과 기억은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현상일 뿐이라는 이분법은 통하지 않는다. 자전거 타기와 통증과 경험과 기억은 얽히고설킨 실타래와 같은 몸의 실존이다. 나는 나도 모르는 몸의 지혜이고 몸이 바로 나다!

자전거 타기의 고수들에게 자전거는 몸과 하나다. 44년 전 우리도 달리는 자전거 위에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핸들을 잡지 않아도 균형을 잡고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다. 우리 몸은 자전거에 적응했고 자전거는 근육과 뇌에 새겨져 우리와 일체가 되어 있었다. 물론 자전거와 떨어져 살았던 세월 속에서 그렇게 몸속에 새겨진 자전거는 서서히 지워졌고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하지만, 남아 있던 흔적을 더듬다 보니 옛 추억과 더불어 되살아나는 몸속 자전거를 느낄 수 있었다.

올여름, 중단했던 종주 코스의 나머지를 끝내려 한다. 한반도에 있는 모든 자전거 코스를 완주한 노인들에 비하면 아주 아주 소박한 계획이다. 하지만 추억이 새겨진 몸과 더불어 세월의 흔적과 함께 달라진 또한 달라질 나를 추억하는 값진 여행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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