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역병 대처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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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유형문화재 제443호인 ‘구상덕 승총명록’. 문화재청 제공

코로나19와 지루한 싸움 속에서 계간 <역사비평> 여름호의 글 ‘시골 양반 역병 분투기’(김호 경인교대 교수)에 눈길이 간다. 18세기 경남 고성군 거류면에 살았던 시골 선비 구상덕(1706~1761)의 당대 풍속이 망라된 37년 치 일기 승총명록(勝聰明錄·경남 유형문화재 제443호)에서 뽑아낸 역병 분투기다.

김호 교수 ‘시골 양반 역병 분투기’
선비 구상덕 일기 ‘승총명록’ 연구

승총명록이 기록한 당대 삶은 역병과 재난의 연속이었다. 특히 1732~1733년은 대기근과 흉년으로 혹독했다. 1732년(영조 8년)엔 자식들이 나았다고 기뻐 잔치까지 벌였던 고성 사또 김동준이 역병으로 숨지기도 했다. 1733년 구상덕은 큰형님, 5촌 숙부와 숙모, 작은 매형, 집안 머슴 둘을 역병으로 줄줄이 잃었다. 그는 ‘만고에 드문 해’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뿐만 아니다. 1740년 부인이 역병으로 사망했고 1748년 두 살짜리 손녀딸은 감기로 죽었고 노비 둘은 마마로 숨졌다. 1757년에는 19세 딸이 역병으로 목숨을 잃었는데 익숙해질 수 없는 죽음 앞에서 구상덕은 매우 상심했다. 시골 선비가 이 정도였으니 기록되지 않은 일반 백성들의 화는 오죽했을까.

당시에는 웃지 못할 처방법이 많았다. 온몸 통증을 동반한 괴질에는 소똥 즙을 달여 먹었고 유행성 감기에는 어린아이 오줌 한 사발에 참기름 1홉을 섞어 복용하고 땀을 냈다. 어린아이, 개, 고양이에게 깨끗한 음식을 먹인 뒤 나온 똥을 말려 불에 태운 재를 꿀물에 타 먹는 천연두 처방 약도 있었다. 말 그대로 소똥도 개똥도 오줌도 가릴 것 없이 약으로 다 썼다.

역병이 나돌 때 대처는 오늘날과 비슷한 것도 있었다. 환자들을 인적 드문 들판에 세운 피막(避幕)에 격리했고 산사 암자나 이웃으로 피접하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행했다. 역병의 재난 속에서 구상덕이 잃지 않았던 것은 공동체의 안녕에 기여하려는 의지와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고 한다.

최학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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